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시장의 팽창으로 '맞춤형 반도체(ASIC)'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및 디자인하우스 업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설계 용역 수수료에 의존했던 수익 구조가 대규모 양산 기반으로 재편되면서, 국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만성 적자를 탈피해 고부가가치 양산 모델로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차량용 AI 반도체 팹리스 보스반도체는 전날 87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 유치를 확정 지었다. 누적 투자액은 약 1000억원에 달한다. 이번 투자는 단순히 운영 자금을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완성차 업체(OEM)의 요구에 대응하는 2나노 첨단 공정 설계와 차세대 패키징 기술인 '칩렛(Chiplet)' 공정 내재화를 위한 실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보스반도체는 자체 시스템온칩(SoC)인 '이글-N' 개발과 함께 고객사향 ASIC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확보된 재원은 설계 인력 확충과 올해 양산을 위한 체계 고도화에 투입될 예정이다. 칩 하나에 사활을 걸던 경영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ASIC 수주로 현금 흐름을 확보하며 자체 기술력을 고도화하는 '브로드컴형' 성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평가다.
국내 유일의 TSMC 협력사인 에이직랜드는 올해 초 254억원 규모의 스토리지 컨트롤러 ASIC 양산 계약을 체결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이는 최근 연간 매출의 4분의 1에 달하는 규모로, 일회성 설계 용역(NRE) 매출 중심에서 장기 수익이 보장되는 '양산 기반 매출'로의 구조적 전환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상장 이후 보폭을 넓히고 있는 세미파이브 역시 올해 매출 2000억원과 연간 흑자 전환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현재 세미파이브가 수주한 프로젝트 중 2나노 및 3D-IC 기반 설계 비중은 절반을 웃도는 수준으로 알려졌다. 자체 IP(설계자산) 라이선스와 양산 마진을 결합한 플랫폼 비즈니스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수익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핵심 파트너인 가온칩스도 일본 시장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일본 유력 AI 업체로부터 수주한 557억원 규모의 AI 가속기 프로젝트 매출이 올해 하반기부터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하며 해외 매출 비중을 끌어올릴 전망이다.
국내 생태계에 활기가 도는 이유는 글로벌 빅테크들이 기성 반도체 대신 자신들의 소프트웨어에 최적화된 '맞춤형 칩'을 원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설계도만 그려주고 수수료를 받았다면, 이제는 설계부터 파운드리 공정 관리, 최종 패키징까지 책임지는 '원스톱 솔루션'을 제공하며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다. 2나노 같은 초미세 공정은 설계 오류 시 수천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어, 실력이 검증된 국내 파트너사들의 몸값이 치솟는 양상이다.
실제로 주요 기업들은 설계 단계에서 확보한 프로젝트들이 속속 실제 칩 생산으로 이어지면서, 전체 매출 내 양산 비중을 30~50% 수준까지 끌어올리며 실적 가시성을 높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초미세 공정 환경에서는 설계 실력만큼이나 양산 수율 관리 및 공정 최적화 역량이 핵심 경쟁력"이라며 "ASIC 수요 확대에 맞춘 선제적 투자와 양산 전환 속도가 향후 K-팹리스의 기업 가치를 결정 짓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