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이 2021년부터 수백억원을 들여 매년 수백 곳의 국가 지정·등록문화재 3D 정보를 수집해 자료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직 자료 보존 목적에 머무는데, 많은 사람이 이용하게 하면 우리 유산이 한류(韓流) 콘텐츠로 더 많이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공간 정보 권위자인 허준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는 "3D 데이터의 본질은 한 사람이 소비해도 다른 사람의 소비를 방해하지 않고, 공유될수록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비경합성에 있다"면서 "국민 세금을 들여 수집한 국가유산 3D 데이터를 더 많은 국민과 산업계가 실제로 볼 수 있도록 가치 창출의 인프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최근 국가유산청과 함께 지난해 3월 발생한 영남권 산불로 영영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국가유산을 3D 가상현실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되살렸다. 당시 산불로천년 고찰인 고운사의 보물 연수전과 가운루, 청송 사남 고택이 전소되는 등 국가유산 총 36건이 피해를 봤다.
허 교수는 산불 피해 소식을 듣고 국가유산청이 이미 구축한 국가유산 3D 데이터 가운데 피해를 본 유산 5건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유산 3D 데이터는 보통 기가바이트(㎇)급으로 커서 그동안 스마트폰에선 보기 어렵고 성능 좋은 컴퓨터에서 전문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봐야 했다. 경북 김천 직지사의 3D 데이터만 해도 21㎇에 이른다. 이 파일을 제대로 가상현실로 구현하려면 실리콘밸리 스튜디오에서나 볼 법한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이 필요했다. 허 교수팀이 선보인 기술은 3D 모델을 중앙 서버에서 렌더링한 뒤, 사용자에게는 단순한 이미지 스트리밍 형태로 전송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많은 사용자가 저가형 스마트폰 하나로도 천년 고찰을 고사양 PC 게임을 하듯 자유자재로 돌려보고 확대할 수 있다. 애초, 이 기술은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감독·설계자가 3D 설계도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의사 결정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 개발됐다.
허 교수는 "3D 데이터의 가치는 이미 게임· 영화 산업에서 증명됐고, 피지컬 AI(Physical AI·자율주행차나 로봇 등 물리적 형태가 있는 AI) 학습 데이터로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며 "3D 좌표를 포함하는 공간 생성 인공지능(AI)이 발전하면 국가유산청이 보유한 한옥·사찰·지형 데이터는 산업계가 사용할 수 있는 고품질 AI 학습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허 교수와 일문일답.
이번에 3D 가상현실로 되살린 산불 피해 국가 유산에는 어떤 것이 있나.
"3D 데이터가 구축된 유산을 중심으로 작업했다. 당시 산불 피해를 본 국가유산은 많지만, 3D 데이터를 구축한 유산은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과 연수전, 청송 송소 고택,사남 고택, 영양 답곡리 만지송이다."
국가유산 3D 데이터는 어떤 방식으로 만드나.
"자율주행차의 센서로도 사용되는 라이다(LiDAR·빛 레이다)는 물체 표면에 레이저(빛)를 쏴 되돌아오는 시간을 기반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장치다. 이 장비로 유산 표면에 수많은 빛을 쏴 3D 정보를 얻는다. 또 사진을 함께 찍어 3D 정보에 덧붙일 고해상도 텍스처(2D 이미지)로 사용한다. 한 번 촬영해서는 모든 각도의 자료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위치에서 찍은 3D 자료를 이어 붙여 최종 결과물(디지털 트윈)을 만든다."
고운사 연수전을 3D로 체험해 보세요. https://viewer.heagle.conworth.net/?project=yeonsu
위 주소로 접속하면 '연수전'을 360도 회전·확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기존 기술과 차별성은 무엇인가.
"엔비디아의 옴니버스, 에픽게임스의 언리얼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가 선보인 기술은 대규모 3D 데이터 운용과 사용자 수 대비 서버 비용 절감에 따른 확장성에서 경쟁력이 있다. 3D 디지털 트윈은 필연적으로 수십 ㎇의 대규모 고정밀·고해상도 데이터를 다룬다. 이런 경우 보통 속도가 느려지거나 한 명의 사용자를 위해 비싼 서버 컴퓨터 한 대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다. 하지만 컨워스 엔진은 하나의 메모리를 효율적으로 공유해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접속해도 서버의 부하를 최소화한다. 컴퓨터 한 대로 수십~수백 명에게 동시에 서비스할 수 있다는 점이 차별점이다."
일부 3D로 구현된 국가유산은 현실감이 부족해 보인다.
"가상 현실을 구현하는 데이터는 뼈대 역할을 하는 폴리곤, 재질과 무늬를 표현하는 텍스처가 있다. 국가유산청이 보유한 자료 중 폴리곤은 문제가 없다. 일부 텍스처는 저장 용량 문제로 해상도를 떨어뜨린 것 같다. 수집 단계에서 디테일이 부족하면 어떤 방법을 써도 복구하기 어렵다."
현재 기술과 데이터로도 소실된 유산의 복원을 추진할 수 있을까.
"지금의 자료와 기술로도 충분하다. 디테일 보존을 위한 기술 사용에 대한 이해와 충분한 투자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본다."
현재 구축된 3D 데이터는 충분히 활용되고 있다고 보나.
"3D 데이터는 충분히 구축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3D 데이터가 너무 커서 생기는 문제, 즉 기업가나 연구자, 일반 사용자가 활용할 수 있도록 실시간 전달할 수 있는 기술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정부가 애써 구축한 초대용량 국가유산 3D데이터를 가급적 많은 사람과 기업이 제약없이 이용할 방법을 컨워스가 제공할 수 있다."
AI 시대에 3D 데이터는 왜 중요한가.
"가령 애플의 비전 프로에 국가유산 3D 데이터를 연계한다면 더는 보관용 데이터가 아닌 '경험하는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넓게 보면 AI의 미래는 3D 공간에 있다. 컴퓨터에 갇혀 있던 AI가 실세계 공간으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들어가 경험하는 살아 있는 유산을 넘어 이 공간을 원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가령 1000년간 문화재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앞으로 3D 데이터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변수는 무엇인가.
"데이터 구축 기술은 상업 측량 장비의 발전과 컴퓨팅 파워의 발전으로 거의 평준화됐다고 해도 무방하다. 차별성은 3D 데이터로 어떤 서비스를 개발하느냐, 또 이를 뒷받침할 소프트웨어 기술과 제도에 있다. 가령 정부 예산이 700억원가량 투입된 국가유산 원형 기록 통합 DB 구축 사업의 결과물을 전 세계인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하고, 이를 내려받아 상품이나 콘텐츠로 활용하는 적절한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K-컬처의 새 지평이 열릴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