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미국, 일본, 독일, 한국, 대만 등 각국 반도체 기업이 벌인 ‘치킨게임’ 끝에 세계 D램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3강 독점 체제가 10년 이상 유지돼 왔습니다. 전체 D램 시장 점유율의 90% 이상을 독점하고 있는 세 회사는 시장 수요와 공급에 맞춰서 탄력적으로 D램 생산량을 조절하면서 안정적인 고수익을 누려왔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끼어들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태평성대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중국 CXMT(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는 DDR4 구형 D램 제품을 자국 기업들에 납품하기 시작했고, 점점 공급 규모를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모두 CXMT의 시장 진입에 따른 영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CXMT가 올해 D램 생산능력을 50% 이상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시장의 공포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메모리 치킨게임은 결국 가격경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경쟁사의 적자 규모를 키워 회생 불가 상태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승리 방법입니다. 그런데 막대한 정부 자금으로 사실상 공기업처럼 운영되는 중국 기업들과의 치킨게임은 사실상 불공정한 경쟁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 아직 드러나지 않은 CXMT의 진짜 기술력
관건은 CXMT의 D램 생산능력과 기술력에 대한 부분이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비상장 기업인 CXMT는 구체적인 매출액, 수익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D램 개발과 생산 로드맵에 대한 공식 자료에도 의문점이 많습니다. 정상급 기술력을 보유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비교하면 당연히 열위에 놓여있지만, 어느 정도의 격차가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김건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CXMT의 내년 생산능력 전망치가 웨이퍼 기준 월평균 30만장 수준에 달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웨이퍼 생산능력만 커질 뿐이지 D램 웨이퍼당 생산용량(Gb/Wafer)은 지난 4년간 개선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생산설비를 기준으로 한 점유율은 전체 시장의 14% 수준이지만, 메모리 용량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7%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 역시 “중국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지나친 공포감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구형 D램이든 신형 D램이든 가장 중요한 건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수율, 규모의 경제가 확보되지 않으면 100달러짜리 칩을 만드는 데 500달러가 드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장 진입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과거 디스플레이 산업을 키웠던 방식으로 정부 자금을 쏟아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기업 BOE는 설비투자부터 운영 등 모든 부분에 정부 자금이 투입됐으며, 수년간의 적자를 아직도 보조금으로 메꾸며 운영되고 있습니다. 10조원이 넘는 금액의 8.6세대 투자금 역시 정부 보조금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정부 자금으로 키우는 ‘괴물’ 기업… D램서도 통할까
최근에는 ‘마르지 않는 샘’ 같던 중국의 기업 보조금 역시 서서히 한계에 도달해 가고 있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국가 부채가 엄청나게 높은 상태이며, 중앙 정부도 이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 실장은 “특히 지방 정부의 경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위 ‘그림자 금융’이 상당히 존재한다”며 “정부 자금으로 사기업을 공기처럼 운영하는 방식도 서서히 한계가 오고 있으며 현재 추정으로는 그림자 금융을 포함해 중국 부채가 GDP(국내총생산)의 400%를 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조 실장은 이어 “CXMT의 기술력은 잘 파악하기 힘드나 CXMT 역시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공기업 성격이며, 이 기업들의 CEO 자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공장을 더 짓는 것뿐이다”라며 “그래서 해당 기업이 밝히는 메시지의 진위를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CXMT의 기술 로드맵이나 설비투자 계획 등이 내부 선전을 위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중국 CXMT의 D램 기술력이 경계해야할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일부 전문가의 관측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최정동 테크인사이츠 박사는 “CXMT는 최근 수년간 웨이퍼 생산량을 늘려왔고 특히 양산 수율을 개선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했다”며 “지난해 초 (레거시 D램) 수율이 5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올해는 상당히 개선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