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 네덜란드 ASML이 올 3분기(7~9월) 실망스러운 주문 성적을 내놓으면서 주가가 15.6% 급락했다. 1998년 6월 이후 최대 낙폭이다. 3분기 실적 자체는 양호했으나, 장비 예약 금액이 시장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친 여파다. 인공지능(AI) 부문 이외의 반도체 시장 수요가 부진하다고 본 ASML은 내년 매출 전망도 낮췄다.
ASML은 15일(현지시각) 올 3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약 20% 오른 74억7000만유로(약 11조원), 주당순이익은 약 31% 증가한 5.28유로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ASML은 당초 16일 실적 발표 설명회와 함께 3분기 실적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실수로 하루 전 ASML 웹사이트에 실적이 공개됐다. ASML은 기술적 오류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실적 쇼크의 핵심은 3분기 장비 예약 금액이다. ASML은 3분기 순예약(net bookings·취소된 주문을 제외한 예약액)이 26억3300만유로(약 3조9000억원)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시장조사업체 LSEG가 집계한 시장 전망치 56억유로(약 8조32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 성적이다. 여기에 내년 매출 전망치를 300억~350억유로(약 44조6000억~52조원)로 제시하면서 시장 우려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는 앞서 발표한 내년 매출 가이던스 범위의 하위 절반에 그치는 수준이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AI 분야에선 계속해서 강력한 발전과 상승 가능성이 있는 반면, 다른 시장 부문들은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며 “현재 수요 회복 속도는 이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완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추세는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이로 인해 일부 고객들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특히 ASML은 부진한 장비 예약 실적을 두고 “EUV(극자외선) 리소그래피(노광) 장비에서의 수요 지연이 원인”이라고 전했다. 노광기는 반도체 원판(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데 쓰이는데, ASML이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는 EUV 노광기는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이 첨단 칩 생산에 사용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 반도체 업계의 자본 지출 사이클이 둔화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AI 관련 칩에 생산 능력을 집중하고, 이외의 생산 용량은 제한적으로 추가하고 있다. 로직 반도체 제조업체 역시 장비 주문을 연기하는 추세다. 최악의 실적 위기를 겪고 있는 인텔은 파운드리 자본 지출을 줄이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신규 반도체 생산 공장인 평택 P4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 팹의 발주를 미뤘다.
여기에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ASML 노광기의 중국 수출길이 제한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로저 다센 ASML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날 “내년 중국 사업이 회사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회사의 주문 잔고에 나타난 비율과도 일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6월 ASML은 매출의 49%가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밝혔는데, 내년엔 중국 비중이 이보다 29%포인트(P)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