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 인스톨 엔지니어인 김혜중 ASML코리아 프로./ASML코리아 제공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 ASML 한국지사에서 9년째 인스톨(설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김혜중(32) 프로는 지난 7일 조선비즈와 만나 “외국 엔지니어들과 협업할 일이 많은데, 한국 엔지니어들은 설치 기한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다”며 이같이 말했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ASML은 반도체 첨단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노광)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업체다. 지난해 매출 276억유로(약 41조원)를 기록했다. 노광기는 반도체 원판(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데 쓰인다.

ASML 노광 장비는 대개 크기가 3m 이상으로 본사에서 모듈별로 분리해 항공으로 배송된다. 이 모듈을 갖고 한국에서 통상 엔지니어 5~10명이 팀을 이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간 반도체 장비 1대를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ASML 한국지사에는 240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 중 80%가 엔지니어다. ASML은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어, 설치 엔지니어들의 주 무대는 전국 각지의 고객사 클린룸(반도체 생산라인)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정해진 기한 내에 문제 없이 장비를 설치하는 건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장비 준비가 늦어져 시장 진입 타이밍을 놓치면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김 프로는 “모든 반도체 기업이 사용하는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도 업체마다 원하는 사양이 달라, 연차가 높아져도 중압감은 여전하다”며 “고객사 클린룸에 들어가기 전 철저한 공부는 필수”라고 했다. 국내 ASML 엔지니어들은 ‘오답 노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서 해결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추후 엔지니어들끼리 이를 문서화해 공유하는 ‘지식 전달(KT·Knowledge Transfer)’ 과정이 일상적이라고 김 프로는 설명했다.

ASML 엔지니어들이 반도체 클린룸에 설치된 EUV 노광기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ASML

엔지니어의 실수로 인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ASML의 업무 체계는 모듈화돼 있다. 한국 장비 설치 엔지니어들은 ‘3일 근무, 3일 휴식, 1일 오피스(사무실) 근무’가 원칙이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사흘간 일한 후 3일을 쉬고, 이후 사흘은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 근무하는 방식이다. 근무 교대 전에는 당일 업무 과정을 기록하는 리포팅(reporting·보고)이 필수다. 이 보고 문서는 전 세계 ASML 엔지니어들이 열람할 수 있다.

김 프로는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장비 현장에선 엔지니어 간 소통이 굉장히 중요해 조직문화도 수평적”이라며 “선후배 상관없이 팀 내 토론이 활발하다”고 했다. 광운대 전자물리학과를 졸업하고 ASML에 입사한 김 프로는 “몇 년 전만 해도 ASML이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위상이 달라진 걸 체감한다”며 “신입 후배 중에는 세 번 넘게 지원해 입사한 경우도 있다”며 웃었다. 김 프로를 포함한 여성 엔지니어는 ASML코리아 전체 엔지니어의 12%다. 아래는 일문일답.

김혜중 ASML코리아 인스톨 엔지니어가 지난 7일 경기 화성 ASML코리아 본사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ASML코리아 제공

—근무 일과를 설명해달라.

“먼저 오피스로 출근해 전 근무자와 인수인계를 하고 팀원들과 장비 관련 미팅을 한다. 이후 고객사 팹으로 이동해 방진복을 갖춰 입고 장비 설치 작업을 시작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네덜란드 본사에 연락해 본사 엔지니어와 협업을 하기도 한다. 근무가 끝나기 전 오피스로 돌아와 다음 근무조에 하루 업무를 리포팅하고 퇴근한다. ‘정말 3일 일하고 3일 쉬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이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장비 설치 프로젝트가 끝나면 유지·보수 엔지니어팀에 인수인계하는 것까지가 설치 엔지니어의 역할이다.”

—업무 매뉴얼이 구체적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4시간 이상 장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본사에 연락할 것’ 등의 매뉴얼을 비롯해 ‘중량물을 옮길 땐 훈련과 허가를 받은 사람만 조작할 것’ 등과 같은 ‘생명 보호 규칙(Life Saving Rule)’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엔지니어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지 않고, 정확한 매뉴얼에 따라 반도체 장비를 다룰 수 있게끔 한 것이다.”

—고객사별로 설치 요구사항이 천차만별이라 매번 새롭겠다.

“매일 장비를 공부하고 현장에 투입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맞닥뜨릴 때가 많다. 그래서 엔지니어들끼리 ‘이번에 이런 장비를 다뤘는데 새로운 게 추가됐다’는 식으로 경험을 자주 공유한다. 현장에 투입되는 엔지니어 외에도 문제 분석을 전담하는 엔지니어들이 있어 그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신입 시절에는 장비의 어떤 부분을 만지면 안 되는지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운데, 이때 시니어 엔지니어와 함께 팹에 투입돼 설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OJT(현장 훈련) 기회가 많다. 이에 회사 내부에서는 ‘스피크 업(Speak Up·목소리 내기)’을 강조한다. 장비 설치에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분위기다.”

—설치 엔지니어가 갖춰야 할 역량은 무엇인가.

“적응력이 중요하다. 설치 엔지니어는 국내외 다양한 팹(반도체 생산공장)에서 일하는데, 대개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업무를 해야 한다. 장비 설치 과정에서 고객사와의 긴밀한 소통도 필수적이기 때문에, 근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의 모듈을 조립하는 데에도 많은 인력이 투입되다 보니 실수가 나오기 마련인데, 이때 문제를 정확히 공유해야 해결도 빠르게 할 수 있다.”

—여성 엔지니어로서 어려운 점이 있나.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협소한 설치 공간에서 도구 없이 힘으로만 너트를 풀어야 할 때가 있는데, 도저히 안 될 때가 있다. 그럴 땐 다른 엔지니어에게 도움을 청한다. 반대로, 섬세한 조정이 필요한 작업에서는 손이 작은 게 유리할 때가 있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여성 엔지니어가 많지 않다 보니 고객사에서 더 쉽게 기억하고 다시 찾는 경우가 있어 긍정적인 면도 많다.”

—ASML이 국내 재제조센터를 확장하고 있는데, 장비 수급 기간이 단축되고 있나.

“현지화에 속도를 내면서 장비 수급 속도가 확실히 빨라졌다. 예전에는 부품에 문제가 생기면 네덜란드 본사로 보내 현지 분석 과정을 거친 후 개선된 부품을 받아야 했는데, 이젠 국내에서 부품을 수급하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다. 본사에서도 국내에서 부품을 재제조(재사용 및 수리)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계속 개선하고 있어, 앞으로 장비 수급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