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위 PC 회사인 HP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부품을 모두 직접 개발했다. 그래픽 칩과 운영체제(OS)를 자체 개발하고 인텔과 협력해 자체 CPU(중앙처리장치)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을 수직적으로 운영하는 사업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에 이르자, HP는 IT 생태계 내 협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술이 급변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HP는 전통적인 하드웨어 중심 사업 모델에서 벗어나 AI 플랫폼 기업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짐 노팅엄 HP 첨단 컴퓨팅 솔루션 부문 수석부사장은 지난 5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국내 최대 테크 콘퍼런스 ‘스마트클라우드쇼 2024′ 직후 인터뷰에서 “특정 분야에서 선두주자가 되거나 최고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회사만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 일”이라며 “최근 몇 년간 HP는 다시 기술 혁신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왔으며, 고객이 HP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솔루션, 나아가 AI 장치까지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IT업계에 몸담고 있는 노팅엄 수석부사장은 기업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혁신 여부는 결국 고객이 결정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청년 시절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최첨단 기술에 집착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기술을 갖고 있어도 실제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기술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며 “아무리 훌륭한 발명품일지라도 고객이 ‘이게 내 업무 방식을 완전히 바꿔놨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건 혁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비즈니스를 하는 이유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오랜 세월 일하며 깨달은 확고한 철학은, 혁신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고객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둬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HP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사업을 이끌고 있는 노팅엄 수석부사장은 미 유타주립대에서 전기공학 석사를 받은 뒤 1992년 HP에 R&D 엔지니어 겸 설계자로 입사했다. HP 경력만 30년에 달하는 그는 5년 전 HP프린팅코리아 대표직을 역임했다. 지금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전 세계 기업에 첨단 컴퓨팅 솔루션을 공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첨단 컴퓨팅은 상업용 컴퓨팅의 전문화된 버전으로, 주로 기업 내 고성능 연산 작업을 맡는 조직에서 수요가 나온다. 노팅엄 수석부사장은 “AI, 데이터 사이언스, 의료 등 실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고급 컴퓨팅을 다루는 이들을 고객으로 만날 때마다 영감을 받는다”며 “그들이 세상을 바꿀 도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금 내 일자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AI 시대 HP의 차별화 전략은 무엇인가.
“AI 시대엔 HP만의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용자들이 AI를 쉽게 활용할 수 있는 ‘AI 크리에이션(creation·창작) 센터’를 개발해 도입했다. HP AI 창작 센터는 이용자들이 다양한 AI 기술을 활용해 콘텐츠를 생성하거나, 대규모 데이터 처리, AI 모델 학습 등의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지원하는 플랫폼이다. 엔비디아와 협력해 GPU 클라우드(NGC) 도구와 사전 학습 모델을 통합했고, 갈릴레오와도 손잡고 AI 환각을 줄이는 기능을 추가했다. 여기엔 데이터 과학자들이 공유 플랫폼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도 포함된다. 어떤 기기를 사용하든 동일한 작업 공간에서 작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한달 내 AI 개발과 관련해 워크스테이션 사용 방식을 완전히 바꿀 만한 새 솔루션도 발표할 예정이다.”
—왜 이런 AI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나.
“지난 4~5년간 고성능 컴퓨팅 수요가 높은 데이터 과학자들과 긴밀하게 협업을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어떤 협업 플랫폼을 사용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런데 웬걸, 애초에 협업 플랫폼 자체가 없더라. 그래서 아예 새롭게 만들기로 하고 지난 4년간 데이터 과학자 대회를 열고 우승자들을 모셔와 우리가 만든 플랫폼에 대한 피드백을 여러 차례 주고받으면서 최상의 툴로 개선해 나갔다. 그 결과 HP의 AI 창작 센터에 속하는 AI 스튜디오가 탄생했고, 머신러닝이나 데이터 사이언스 등 분야가 무엇이든 작업자들은 이 플랫폼을 만능 작업대처럼 사용될 수 있게 됐다.”
—첨단 컴퓨팅을 원하는 수많은 글로벌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있는데, 이들의 가장 큰 니즈는 무엇인가.
“이 사업 분야의 재밌고 특이한 점은, 첨단 컴퓨팅 고객 중 현재 보유한 기기의 성능이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평가하는 곳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거다. 이쪽 고객은 계속 높은 성능을 원하기 때문에 우린 엔비디아, 인텔, AMD 등과 같은 파트너들과 밀접하게 협업하면서 최대한의 퍼포먼스(성능)를 구현하고자 노력 중이다. 안정성을 높이려고 하이엔드(고급) 제품의 경우 출시 전 테스트만 36만 시간을 돌린다. 또 고객들은 사업에서 더 빠른 결과를 낼 수 있게 작업 흐름을 단순화하길 원한다. 이에 성능이 좋은 하드웨어에 더해 더 나은 솔루션을 계속 개발해 제공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고객 중심을 강조하는데, 최근 고객의 고충을 해결한 사례가 있나.
“최근 어도비와 협업해 AI 디바이스를 만들었는데, 패션업계에서 시안을 구상할 때 실제 상품과 정확히 일치하는 3차원(3D) 디지털 시제품을 만들어 내는데 유용한 제품이다. 디지털 소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건 패션 쪽이나 게임 개발자처럼 3D 작업 종사자들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 이 니즈를 해결하려고 컴퓨팅이 가능한 8K 3D 스캐너 장치를 만든 거다. 이는 업계에서 유일하게 HP와 어도비가 구현한 것이다.”
—앞서 수십년 동안 컴퓨팅 성능이 빠르게 발전하는 걸 보면서 AI가 모든 곳에 적용되는 시대가 오리라 예상했나.
“1992년쯤 공학 석사를 받을 때, 신경망을 설계해 인공위성의 제어 시스템을 훈련하는 내용을 논문에 썼다. 설계는 실제로 작동하기도 했다. 그 당시엔 신경망이 학습하고 뭔가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게 매우 놀라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단순한 AI 사용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이후에도 계속 AI에 관심을 두면서 AI 시대가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사실 10년 전에도 오디오 품질을 자동으로 높이는 등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이미 AI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생성형 AI가 이렇게 빠르게 발전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엔비디아가 GPU를 기반으로 AI 분야에서 크게 성장한 건 매우 인상적이다. 이제 AI의 규모와 성능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이제야 정말 유용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