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과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이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MWC 2024'에서 나란히 이동하고 있다./뉴스1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세계 최초 상용화 등 여러 성과를 이룬 SK텔레콤의 노력이 (정경유착 논란으로) 폄훼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본사 앞에서 유영상 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날 SK텔레콤은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디지털 이동전화를 상용화한 공로로 ‘정보통신기술(ICT)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국제전기전자공학자협회(IEEE) 마일스톤’에 등재됐습니다. 캐슬린 크레이머 IEEE 차기 회장, 고진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위원장, 송상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 최원준 삼성전자 모바일경험(MX)사업부 개발실장 등이 한자리에 모여 SK텔레콤의 등재를 축하했습니다.

CDMA는 한정된 주파수 대역을 많은 사용자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기술입니다. SK텔레콤은 CDMA 기술을 통해 이전에 활용한 아날로그 방식보다 통화 용량을 10배 늘리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유럽·일본 등 기술 강국이 ICT의 역사를 써내려갔지만, SK텔레콤은 2G(2세대 이동통신)의 대표적 방식인 CDMA로 국내 기업 최초로 한획을 그은 것입니다.

SK텔레콤 본사 사옥 4층에서 진행된 본행사에서 국내 ICT업계 주요 인사들이 축하인사를 건넸습니다. CDMA 상용화 당시 개발부장을 맡았던 이주식 성균관대 교수, 과거 SK텔레콤에서 CDMA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직원 등 총 25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환영사를 위해 연단에 올라선 유 사장은 “CDMA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밤낮없이 고생한 구성원들 덕”이라고 했습니다.

유영상(가운데) SK텔레콤 사장이 10일 서울 을지로 본사에서 진행된 'IEEE 마일스톤' 수여 본행사에서 연단을 응시하고 있다./김민국 기자

SK텔레콤의 눈부신 업적을 축하하는 자리지만 이날 유 사장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습니다. SK그룹 총수인 최태원 회장을 둘러싼 법적 리스크의 중심에 SK텔레콤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 회장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패해 1조3000억대 재산을 내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는 항소심 재판부가 SK그룹이 노 관장의 아버지인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정경유착 논란입니다. 재판부는 1990년 당시 SK그룹 경영기획실 소속이었던 최 회장이 청와대에서 무선통신을 시연했고, 사위가 아닌 일반 기업인이라면 이 같은 기회를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2년 8월 선경텔레콤(현 SK텔레콤)은 제2 이동통신 모집 경쟁에서 사업자로 선정됐습니다. 이에 현직 대통령 사돈 기업에 사업권을 부여한 것이 특혜라는 비판이 나오자, 사업권을 일주일 만에 반납하게 됩니다. 당시 SK 측은 “차기 정권에서 사업성을 평가 받아 정당성을 인정받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SK그룹은 김영삼 정권에서 신규 사업권 획득에 더 많은 비용을 들여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 지분 23%를 4721억원에 인수했습니다.

최 회장은 항소심 결과가 나온 후 그룹 내 불만을 의식, 사내 포털망을 통해 직원들에게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그는 지난 3일 “개인사에서 빚어진 일로 의도치 않게 걱정을 안겨드려 죄송하다”며 “그룹과 구성원의 명예를 위해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상고심에서 반드시 곡해된 진실이 바로잡힐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CDMA 시절 전성기를 구가했던 SK텔레콤의 현 위상이 과거와 같지 않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SK텔레콤은 지난 2001년 음성뿐 아니라 데이터까지 자동 로밍할 수 있는 ‘무선데이터 접속 로밍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시작했습니다. 2006년에는 중국 제2 이동통신사인 ‘차이나유니콤’에 기술력을 인정받아 CDMA 서비스에 대한 전략적 제휴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5G(5세대 이동통신) 28㎓(기가헤르츠) 주파수 할당을 포기하면서, 5G 시대에서는 기술 주도권을 상실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ICT업계 관계자는 “SK텔레콤이 최근 ‘인공지능(AI) 컴퍼니’를 내세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내 최대 이동통신 회사”라며 “본업인 무선통신 분야에서 기술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데 과거의 영광만을 추켜세우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