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지난달 초 출시한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 프로’를 “VR(가상현실) 기기가 아닌 ‘공간형 컴퓨터’”라고 소개했다. 1시간 30분가량 직접 제품을 체험한 결과 애플의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3500달러(약 466만원)라는 비싼 가격과 제품 무게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마치 아이패드를 눈으로 짊어지는 느낌이라 오래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묵직한 배터리팩을 연결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점도 아쉬웠다. 아직은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이 거의 없다시피해 이용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설명처럼 차세대 컴퓨터 역할을 충실히 하는 제품이라는 점은 의미가 있다. PC처럼 제한된 넓이의 기기에 창을 띄우는 게 아니라 이용자가 있는 공간 전체를 활용해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브라우저 창을 집은 상태로 어디든 돌아다니면서 인터넷 서핑이나 동영상 시청 등이 가능했다. 버튼·제스처 인식도도 정확해 마우스와 키보드의 부재가 크게 아쉽지 않았다. 준수한 화질과 성능이 뛰어난 지향성(특정 위치에만 소리를 전달하는) 스피커가 제공하는 품질 높은 VR 환경도 인상적이었다.

애플의 MR 헤드셋 '비전 프로'./김민국 기자

◇ 수십대 컴퓨터 들고 다니는 효과… 준수한 화질·스피커 기능 만족스러워

비전 프로의 최대 장점은 공간 제약 없는 컴퓨터 작업이었다.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 기사를 읽다가 물을 마시고 돌아왔는데 창이 같은 공간에 고정된 상태로 띄워져 있었다. 창을 다른 공간으로 움직이고 싶을 땐 검지와 엄지로 하단을 잡고 끌어당겨 원하는 위치에 놓으면 된다. 실행 창도 사실상 무제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수십 대의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비전 프로를 활용해 다양한 공간에서 창을 띄워놓고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다. /김민국 기자

비전 프로에는 8코어 CPU(중앙처리장치), 10코어 GPU(그래픽처리장치), 16코어 NPU(신경망처리장치)가 적용돼 있다. 코어가 많을 수록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성능 덕분에 인터넷 창을 20개 이상 띄워놔도 버벅거리는 현상이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문서 작업을 하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등 멀티태스킹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화질이 준수한 데다 사용자 귀에만 잘 들리도록 설계된 지향성 스피커의 성능도 뛰어나 콘텐츠 몰입도가 높았다. 비전 프로의 인치당 화소 수는 3386ppi(인치당픽셀)로 HTC 바이브 프로(950ppi)나 메타 퀘스트3(1218ppi)를 압도했다. 현존하는 MR 헤드셋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화질을 자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유튜브를 전체화면으로 시청할 때는 100인치가 넘는 고화질 TV를 시청하는 느낌이었다. 화면 크기도 자유자재로 조절 할 수 있다.

지향성 스피커의 음질도 뛰어나 음악을 듣고 싶을 때 별도로 이어폰 등을 착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이용자의 귀에만 소리가 들려 주변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 음악 앱이 실행되는 창의 위치에 맞춰 소리도 좌우로 함께 이동해 눈앞에 무대가 있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다만 볼륨을 최대로 높였을 때는 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렸다.

‘공간 동영상’ 기능도 유용했다. 이 기능은 촬영해 둔 동영상이 비전 프로 화면에 3D(차원)로 펼쳐져, 마치 내가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몰입감을 제공했다. 비전 프로를 착용한 후 사무실 내부를 돌아다니며 영상을 촬영한 뒤, 다시 앉아서 공간 동영상 기능을 통해 시청해봤다. 그러자 촬영 당시의 광경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만약 여행 중에 촬영한 영상을 이 기능을 이용해 시청한다면, 생생한 느낌을 재현할 수 있다.

비전 프로에는 자체적으로 VR 환경을 조성하는 기능도 있다. 이용자의 주변 환경을 설산, 달 표면, 사막으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달 표면으로 VR 환경을 선택하자 실제로 달 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전 프로의 공간 동영상 기능./김민국 기자

◇ 버튼·제스처 인식 정확도 탁월… 키보드는 독수리 타법으로 쳐야 정확

비전 프로는 버튼과 제스처 인식도가 탁월했다. 유튜브 창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팔을 쭉 뻗어 재생 버튼을 눌러야 하고, 가까이 있으면 손가락만 가볍게 들어 버튼을 누르면 된다. 버튼을 누를 때 인식 정확도도 높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다만 키보드 타이핑 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상시 쿼티 자판을 쓸 때처럼 가상 키보드를 사용하면 타이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한 손가락만 이용하는 ‘독수리 타법’을 활용해야 문자를 정확히 입력할 수 있는 점은 불편했다.

비전 프로에서는 검지와 엄지를 붙여 집게 손을 만드는 제스처가 스마트폰에서 ‘확인’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비전 프로는 굳이 기기 앞에 손을 가져다 대지 않고 무릎 위에서, 등 뒤에서 집게 손을 만드는 제스처를 취해도 모두 인식했다.

비전 프로를 착용한 채 검지와 엄지를 붙여 실행 창을 끌어오는 모습. /김민국 기자

비전 프로는 사용자의 시선에 따라 커서가 움직이는 ‘아이 트래킹’ 기능도 제공한다. 직접 손을 움직일 필요 없이 눈동자를 굴리는 것만으로 어떤 앱을 실행할 지 정할 수 있다. 몇가지 초기 설정을 마치면 꽤 정확한 인식도를 보였지만, 완벽한 수준은 아니였다. 커서가 헛돌아 원하지 않는 버튼이 눌릴 때가 종종 있었다.

액세서리 구성이나 제품의 마감 수준도 흠잡기가 어려웠다. 비전 프로는 본체를 제외하고 배터리팩, 긁힘 방지 커버와 눈 부위를 덮어주는 ‘라이트 실 쿠션’, 뒤통수를 감싸주는 ‘니트밴드’, 전면부를 닦아주는 ‘폴리싱 천’ 등으로 구성됐다. 제품을 머리에 쓴 뒤 제품 오른쪽에 있는 다이얼을 돌리면 조여지면서 사용자의 머리 크기에 맞게 착용이 가능하다. 눈 부위를 감싸주는 쿠션도 푹신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전 프로의 무게는 눈 앞에 쏠려 있어 뒷목에 피로감을 준다. /김민국 기자

◇ 무게가 뒷 목 통증 유발… 400만원 넘는데 이용할 콘텐츠 없어

기기 무게는 제품의 여러 장점을 무색하게 했다. 비전 프로의 무게는 600g인데, 이는 아이패드 9세대(498g)보다 무거운 수준이다. 제품 구조 상 머리 앞에 무게가 모두 쏠려있다 보니 고개를 돌릴 때 무게감이 느껴졌다. 전원을 켜기 위해 반드시 연결해야 하는 배터리 팩의 무게도 350g 상당으로 묵직해, 1시간만 사용해도 뒷 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용할 만한 콘텐츠가 없다는 점도 아쉽다. 메타 퀘스트3나 소니 VR 2로는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지만 비전 프로는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다. 다운로드할 수 있는 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시청한다고 해도 아직 3D 기능을 제공하지 않아 평면으로 된 TV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비싼 기기 가격이 아직은 부담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