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웹툰이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가는 이유로 탄탄한 스토리와 수준 높은 작화 퀄리티를 빼놓을 수 없다.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가능해진 것은 웹툰 스튜디오의 등장 덕분이다. 기획부터 구성, 작화, 채색, 보정까지 웹툰을 만드는 전 과정을 분업화해 웹툰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린 것이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웹툰 기획·제작사 씨엔씨 레볼루션(CNC Revolution)을 방문했다. 웹툰 제작 전반적인 과정을 관리하는 웹툰 PD들과 각색, 작화는 물론이고 배경만 전문적으로 그리는 그림 작가들까지 총 8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씨엔씨 레볼루션에서 만든 ‘아빠 나 이 결혼 안할래요’라는 작품은 2019년 카카오 픽코마를 통해 일본 시장에 론칭했을 당시 한 달에 20억원이라는 매출 신기록을 쓰기도 했다.
씨엔씨 레볼루션을 이끌고 있는 이재식 대표는 15년은 만화, 15년은 웹툰을 제작하면서 30년 가까이 만화업계에서 일한 인물이다. 대원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인터넷 잡지인 웹진을 거쳐, 2001년 씨엔씨 레볼루션을 세웠다. 사업 초창기부터 온라인 만화 플랫폼을 만들고자 힘썼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웹툰 사업에 뛰어든 것은 2014년쯤부터다. 다음 웹툰에서 강풀 작가의 작품이 연재되기 시작한 2004년을 웹툰 시대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대표가 웹툰 사업에 뛰어든 것은 그보다 10여년 후다.
이 대표는 “2010년 무렵만 하더라도 미리보기 같은 유료 서비스가 없을 때라 작가에게 주어지는 것은 한 달 원고료 수준이었다. 작가나 제작사를 위한 수익모델이 미흡해 웹툰 사업을 크게 할 생각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3년쯤 카카오가 웹툰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1년간 준비를 해서 10여개 작품을 들고 갔는데, ‘허니블러드’라는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으로 웹툰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허니블러드는 2014년 9월 카카오에서 연재를 시작해 불과 3개월 만에 인기 순위 1위에 오른 작품이다.
그 이후에도 이 대표는 한동안 외부에 있는 작가와 계약해 작품을 소싱하다가 3년 전에서야 지금처럼 분업화된 형태의 스튜디오를 구축했다. 그는 “웹툰을 만드는 과정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분업화 돼 있다”며 “메인 작가가 주요 인물을 그리면 보조 작가는 조연을 그리고, 각색하는 사람도 2명을 둔다. 한 사람이 스토리를 각색하면 다른 한 사람은 콘티를 그리는 식”이라고 했다.
또 “후반부로 갈수록 분업화하려면 얼마든지 더 분업화 할 수 있다”며 “특히 후보정을 잘 할수록 작품이 완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작가들을 후보정에 추가로 투입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스튜디오 초창기 작품이었던 ‘희란국 연가’의 경우 최대 12명이 투입되기도 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웹소설을 기반으로 웹툰을 제작하는 ‘노블코믹스’가 대세다. 하지만 이 대표는 이 같은 흐름에서 벗어나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소설을 기반으로 웹툰을 만들면 완성된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이니 완성도가 높아질 수는 있다”면서도 “소설은 소설만의, 웹툰은 웹툰만의 스토리텔링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웹소설은 세계관 설정을 아주 촘촘하게 한 뒤 그 안에서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만들어내는 방식인데, 이를 웹툰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웹툰에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면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어 식상해진다”고 했다. 웹툰도 이제는 웹툰의 방식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작가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회사 이름을 딴 ‘웹툰 캠퍼스’를 세우는 것과, 할리우드에서 영화·드라마로 제작할 만큼 수준 높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웹툰 캠퍼스를 세우는 것은 결국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밑작업이기도 하다”며 “학원도 대학도 아닌, 창작에 대해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작가들이 토론을 할 수 있게 하고 싶다. 재밌는 프로그램도 구성하고 싶다”고 했다. 또 “디지털 전환 속도가 빠르고 이제는 인공지능(AI)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완벽하게 가능하졌기 때문에 일러스트 작가들의 고민이 많아진 상황”이라며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토론하는 것은 물론, 작가들의 영감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문·사회 전문가를 초청해 강의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또 “웹툰에서 IP(지식재산권)라는 말을 쓴 지는 채 몇 년이 안 된다”며 “IP 비즈니스를 글로벌로 확장해 IP 가치를 극대화하고, 회사는 물론 작가와 플랫폼 모두 더더욱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성공 사례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