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5G 통신장비.

오픈랜(개방형 무선접속망·Open Radio Access Network)이 세계 통신장비 시장 지형을 바꿀 기술로 성장하고 있다. 오픈랜은 서로 다른 업체가 만든 기지국 장비끼리 연동할 수 있는 표준화 기술을 말한다. 중국이 장악한 통신장비 시장을 바꿀 기술로 평가받으면서 오픈랜 장비 시장을 공략 중인 삼성전자가 미·중 갈등의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14일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오픈랜 시장은 2025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장, 2030년까지 누적 300억달러(약 40조원) 투자가 기대된다. 올해 오픈랜 관련 투자가 90억달러(약 12조원) 수준인 걸 감안할 때 앞으로 7년간 연평균 24% 성장이 기대된다는 의미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보고서에서 “아시아·태평양, 북미 지역의 신규 네트워크 사업자를 중심으로 오픈랜 투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라며 “기존에 설치된 중국 3G(3세대 이동통신), 4G(4세대 이동통신) 네트워크를 교체해야 하는 필요성에 따라 2025년부터 투자가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 기존 체제에선 한번 특정 회사 제품 쓰게 되면 종속

오픈랜은 기지국 등 무선 통신장비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를 분리해 서로 다른 제조사 장비 간 상호 연동을 가능하게 하는 표준화 기술이다. 그동안은 화웨이 LTE 안테나를 쓰려면 기지국과 소프트웨어 등 모든 기지국 관련 장비를 화웨이 제품으로만 사용해야 했다. 다른 업체 기기나 소프트웨어를 연동해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장비 업체가 제공하는 모든 장비와 서비스를 패키지 형태로 구입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한차례 특정 업체의 기지국을 설치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 장비 업체에 종속되는 데 있다. 가령 통신사가 5G(5세대 이동통신) 기지국을 설치하면 LTE 망을 쓰지 않는 단독모드(SA) 방식을 도입할 경우 처음부터 5G망을 완전히 새롭게 구축해 다른 장비 업체로 갈아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통신사들이 기지국 설치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존 LTE망을 활용하는 비단독모드(NSA) 방식을 도입하기 때문에 다른 장비 업체로 갈아탈 수도 없다. 화웨이 LTE 장비를 사용했다면 5G 기지국 역시 화웨이 장비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픈랜 기술을 도입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오픈랜은 제조사가 다른 기지국 장비를 섞어 사용해도 소프트웨어만 업데이트하면 함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통신사는 기존 장비를 오픈랜 기술로 묶어 쓸 수 있고, 다른 업체의 장비를 각각 구입해 최저의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다. 망 구축에 대한 주도권이 장비 업체에서 통신사로 넘어온다는 점에서 기지국 구축 비용도 줄어든다.

◇ 삼성전자, 트럼프 시절 통신장비 반짝 수혜… 오픈랜서는 경쟁력 있어

오픈랜 기술에 대한 관심은 2019년 중국 장비에 대한 백도어(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응용 프로그램 또는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통로) 이슈가 확산하면서 본격적으로 커졌다. 중국 화웨이와 ZTE의 세계 통신장비 시장 점유율은 43.5%(지난해 말 기준)로 미국과 그 동맹국을 중심으로 중국 통신장비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네트워크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배경이다. 이에 미국, 한국, 일본, 스페인, 독일 등 33개 국 50여개 통신사가 오픈랜을 미래 기술로 점찍고 개발을 시작했다.

오픈랜 시장 성장은 삼성전자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통신장비 시장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통신장비는 3G에서 LTE, LTE에서 5G로 넘어가는 망 전환 시기에 기지국 등 장비 주도권을 뺏어와야 하는데 화웨이와 노키아, 에릭슨 등이 장악한 시장을 제대로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5G 상용화 초기인 지난 2018년과 2019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반중 정책에 힘입어 반짝 수혜를 입기도 했지만, 북미 시장을 제외하면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통신사 입장에서는 스마트폰 시장 1위 업체인 삼성전자에 장비까지 몰아줄 경우 삼성전자의 영향력에 종속될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는 오픈랜 기술에서는 한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디시네트웍스에 오픈랜 솔루션을 공급하는 동시에 보다폰과 유럽 최초로 5G 오픈랜 상용화에 나서는 것도 기술 경쟁력이 영향을 미쳤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서 점유율 7.5%(옴디아 기준)로 화웨이, ZTE, 에릭슨, 노키아에 이어 5위에 올랐다. 하지만 오픈랜 장비 시장에서는 일본 NEC, 후지쯔와 상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삼성전자와 NEC, 후지쯔 등이 미국의 중국 때리기에 따른 반사 효과로 오픈랜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라며 “통신장비 시장이 오픈랜 성장과 함께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반격도 거세다. 미국 통신업체 AT&T는 6G(6세대 이동통신) 시대 핵심 기술이 될 오픈랜 핵심 사업자로 스웨덴 에릭슨을 선정했다. 에릭슨이 노키아를 따돌리고 AT&T의 무선 네트워크를 현대화하게 된 셈이다. AT&T는 미국 정부와 통신 정책을 발맞춰 집행하는 만큼 AT&T의 에릭슨 선정은 통신장비 시장의 지형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오픈랜 기술 확보를 위해 민관 협력 기구인 ‘오픈랜 인더스트리 얼라이언스(ORIA)를 출범하는 등 오픈랜 시장 선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와 삼성전자, LG전자 등 29개 기업과 기관이 힘을 합쳤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오픈랜 활성화 정책 추진방안을 통해 오픈랜 생태계 조성을 지원한다. 동시에 미국, 일본과의 국제적 협력을 통해 오픈랜 기술 개발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