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 9월 업계 최초로 12나노급 32기가비트(Gb) DDR5 D램을 개발했다./삼성전자 제공

1960년대 발명된 이래 중앙처리장치(CPU)와 저장장치 사이 연결고리 역할을 해온 D램이 새로운 진화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초고속 연산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전반적인 컴퓨팅 시스템의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한 필수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컴퓨팅 진보의 걸림돌에서 ‘총아’로 탈바꿈

D램은 한때 폰 노이만 구조로 불리는 현대 컴퓨팅 시스템의 진보를 막는 계륵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CPU, GPU, 신경망처리장치(NPU)와 같이 기존 메모리와 프로세서가 다른 칩에 분리돼 있는 폰 노이만 구조는 메모리 입·출력 병목에 의한 속도 저하, 전력 소모로 성능과 효율성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CPU가 데이터를 연산하기 위해서는 D램을 거쳐 저장장치에서 데이터를 불러오는 단계를 거쳐야합니다. 아무리 CPU나 GPU의 성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두 단계를 거쳐 데이터를 불러와 다시 돌려보내고, 다른 데이터를 또 불러오는 과정에서 성능 저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 흔히 폰 노이만 병목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문에 D램이 다른 형태의 ‘뉴메모리’로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은 학계와 업계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자성체에 전류를 가해 발생하는 전자회전을 활용해 저항값 변화에 따라 데이터를 쓰고 읽는 비휘발성 메모리인 M램을 비롯해 인텔이 ‘3D 크로스포인트’라는 이름으로 명명한 P램 등이 후보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D램을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은 거의 없었습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오히려 지금 시장 트렌드로 봤을 때는 D램의 헤게모니가 더 강화되는 추세라고 봐야할 듯 합니다. D램이 기존에 ‘공산품’처럼 싸게 찍어내는 대량 양산용 범용 제품을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 10일 ‘스페셜티(맞춤형)’ 메모리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 설계, 후공정도 모두 달라지는 D램

SK하이닉스의 5세대 HBM인 'HBM3E'./전병수 기자

학계의 전망과 달리 현재 D램은 단순히 연산처리장치와 저장장치 사이의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데이터 연산, 인공지능(AI) 처리 속도 가속에 혁신적인 바람을 몰고 올 메모리 풀링(Pooling)을 비롯해 연산 코어 간 거리를 좁히는 초미세설계 등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첨단 패키징 기술을 사용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으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D램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존의 서버, PC, 모바일용 D램의 설계도 제품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HBM이나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에 사용되는 D램은 더 정교한 설계와 공정이 적용된다”며 “성능을 끌어올리는 한편 누설 전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복잡한 레시피가 들어가는데 이는 제품마다, 그리고 세대마다 완전히 다른 공정이 필요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D램 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화해지고 있습니다. 데이터센터 애플리케이션의 경우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빨리 처리하기 위해 시스템 내 컴퓨팅 요소의 수와 밀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 많은 코어가 더 많은 메모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HBM이 CPU 다이 내에 실장되는 S램의 기능을 일부 대체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전통적으로 S램과 D램 모두 전하를 저장하는 회로로 구성되지만, S램은 D램보다 더 빠르게 읽고 쓰기가 가능해 CPU 성능 향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캐시메모리로 주로 사용돼 왔습니다. 문제는 S램 제조비용이 D램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것입니다.

지멘스 관계자는 “D램은 프로세스뿐만 아니라 내구성이 입증돼 있으며 S램보다 훨씬 저렴하다”며 “동일한 용량으로 같은 프로세스를 구축한다고 했을 때 D램을 바탕으로 한 HBM이 수백배 이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CPU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데이터를 연산하는 프로세싱니어메모리(PNM)에 적합한 D램 설계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이 연구개발 역량을 쏟아붓고 있는 영역입니다. 이 기술은 데이터 연산 기능에 활용해 CPU와 메모리 간 데이터 이동을 줄여주는 기술로, 연산 기능을 메모리 옆에 위치시켜 CPU-메모리 간 발생하는 병목현상을 줄이고 시스템 성능을 개선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분야에서도 가장 선제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관련 기술을 적용한 제품들을 선보이며 조금씩 상용화를 위한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