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가 강화된 가운데 중국이 서방 규제에 속하지 않는 레거시(구 공정)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면서 중고 반도체 장비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세계 1위 반도체 중고 장비 업체 서플러스글로벌의 주가는 미국의 추가 규제 발표 다음 날 14% 넘게 급등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반도체 중고 장비 업체들은 “오히려 올해 중국발 수요가 크게 줄었으며, 강화된 대중 규제로 사업 위협 요인이 커졌다”고 입을 모은다. 강도 높은 서방 제재가 장기화할 것으로 본 중국이 구 공정 반도체 자립에 집중하면서 장비까지도 국산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달 17일 미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대중 반도체 잠정 규제에 대한 개정 규정안을 내놨다. 인공지능(AI) 칩 규제를 강화하고, 제재 우회 통로를 막고, 제재 대상에 중국 기업 13곳을 추가하는 것이 골자다. 여기에 수출 통제 대상이 되는 반도체 제조 장비 유형도 추가했다. 이로써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뿐 아니라 하위 성능의 일부 심자외선(DUV) 장비 수입까지 막혔다. 시장에서는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성능이 상대적으로 낮은 반도체 중고 장비를 사들일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됐다.
그러나 국내 300여 곳에 달하는 반도체 중고 장비 업체들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중고 시장 큰손 고객이었던 중국은 서방 규제가 심화할수록 반도체 기술 자립에 몰두하면서 외산 장비 구매를 줄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에 공장을 돌리고 있는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미국 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시장에 중고 장비를 내놓지 않고 있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는 “미국의 최종 규정 발표로 그간 이어진 장비 시장의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나,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레거시 공정 국산화율을 더 높일 것이고 이는 결국 장비도 ‘메이드 인 차이나’ 장비를 개발해 쓸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장비 제조 기술은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중국은 매우 다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을 현지에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다”며 “이 때문에 작년 전체 중고 반도체 장비 수요의 40% 이상을 차지하던 중국발 수요가 당장 올해부터 많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반도체 중고 장비 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치솟았던 중국 수요가 급감하면서 올해 매출은 30%가량 줄어들 전망”이라며 “미 규제로 중국의 반도체 자립 시도는 레거시 공정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데, 중국 업체들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천문학적인 정부 지원금을 등에 업고 반도체 장비 현지화를 계속 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중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은 자국 내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중국 화타이증권에 따르면 올 1~8월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의 총 장비 입찰 182건 중 절반에 가까운 47.25%를 현지 장비 업체들이 따낸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올 7~8월 중국 장비 업체 수주 비율은 62%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중국의 대표적인 파운드리 업체인 SMIC와 화홍그룹 등이 외국산 장비를 자국산으로 대체하면서 현지 장비 업체들이 수혜를 본 것이다. 중국 10대 장비 업체의 올 상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9% 증가한 22억달러(약 2조9700억원)을 기록했다고 중국 시장조사업체 치노(CINNO) 리서치는 전했다. 국내 반도체 중고 장비 업체들은 줄어든 중국 수요를 상수로 두고 한국, 대만, 일본, 미국, 유럽 등으로 수요처를 다변화해 안정성을 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