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해 전방위적인 인공지능(AI) 칩 수출 규제에 나선 가운데 다음 제재 대상은 첨단 패키징 분야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같은 전망이 현실로 다가올 경우 중국 쑤저우와 충칭에 패키징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중국 기업에 관련 장비를 납품하는 국내 기업에도 파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일 대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저사양 AI 칩에 대해 중국 수출을 금지한 데 이어 첨단 패키징 장비 납품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발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안전장치) 규정에서 28나노 이상의 반도체 패키징 작업은 규제 대상인 ‘국가안보에 핵심적인 반도체’ 목록에서 제외된 바 있다.
반도체 패키징 기술은 최근 ‘칩렛(Chiplet)’과 같은 형태로 진보하면서 전공정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칩렛은 하나의 칩에 여러 기능을 담은 반도체를 레고처럼 붙이는 기술로, 에너지 효율이 높을 뿐 아니라 고성능 칩을 구현하기가 쉽다는 점에서 ‘게임 체인저’로 불린다. 28나노와 같은 구공정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칩을 패키징하는 방식을 고도화해 성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미국의 첨단 반도체 규제가 오히려 중국 기업들을 패키징 분야에 집중하게 만들고 있다”며 “칩렛과 같은 형태의 신기술로 탈출구를 모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3위 반도체 후공정 전문기업(OSAT)인 중국 JCET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고성능 컴퓨팅에 적합한 패키징 기술 개발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1998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2016년 세계 4위 업체이던 싱가포르 스태츠칩팩을 인수하면서 단숨에 3위에 올랐다.
JCET는 지난 8월 실적발표 보고서에서 “고성능 컴퓨팅 및 스토리지와 같은 새로운 앱(애플리케이션)을 위한 솔루션에 중점을 두고 고급 패키징 기술과 제품 개발을 강화하는 중”이라며 “정보기술(IT) 산업의 혁신을 이끄는 고성능 첨단 패키징 기술의 방향이 점점 명확해지는 만큼, 고품질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기업뿐 아니라 중국 정부 역시 첨단 패키징 기술을 대중 규제에 대한 탈출구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과학기술부 산하 중국 국립자연과학재단(NSFC)은 내달 1일부터 접수가 시작되는 칩렛 기술 개발 프로젝트에 최대 4600만위안(약 83억7000만원)의 자금을 투입한다. 총 30여개 프로젝트를 선발해 3~4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이 같은 허점을 인식한 미국 역시 관련 규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대만 IT 전문매체 디지타임스의 전망이다. 미국 의회조사국(CRS) 연구진도 앞서 보고서를 통해 “28나노 반도체를 규제하지 않는 것은 미국 기술이 중국으로 이전되는 전략적 구멍을 중국에 남겨준 것”이라며 추가 제재를 시사한 바 있다.
추가 제재가 현실화할 경우 국내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쑤저우에 패키징(후공정) 공장을 운영 중이며, SK하이닉스는 충칭에 패키징 공장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측은 해당 공장들이 첨단 패키징에 특화된 공장은 아니기에 큰 영향을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나, 미 정부의 규제에 따라 향후 첨단 패키징 장비 도입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국내 장비 업체들의 고충도 점차 커질 전망이다. 미국 정부의 대중 규제가 시작된 이후 국내 반도체 장비사들의 중국 수출액은 점점 줄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중국 후공정 장비 수출액은 지난 2021년 9억4410만달러에서 지난해 6억6305만달러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전체 장비 수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상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