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겔싱어 인텔 CEO가 20일(현지시각) 미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열린 인텔 이노베이션 2023 행사에서 시에라 포레스트 프로세서가 탑재된 웨이퍼를 들고 있다./인텔 제공

반도체 기술을 둘러싼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기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인공지능(AI) 칩 시장을 선도 중인 엔비디아와 전통의 칩 강자 인텔 수장이 잇따라 공급망 다변화를 강조하고 나섰다. 미국에 뿌리를 둔 두 기업은 중국 리스크(위험)를 줄이기 위한 대안을 찾고 있으나, 전체 매출의 4분의 1 이상을 중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어 이를 대체할 만한 시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22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0일(현지시각) 미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열린 인텔 이노베이션 기술 콘퍼런스에서 기자들에게 “공급망 불확실성은 계속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 아시아 공급망 강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균형 잡히고 탄력적인 공급망을 갖춘다면 불확실성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 정책에 따라 미 애리조나주와 오하이오주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인텔은 독일과 폴란드,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지에 신규 공장을 짓거나 증설을 계획 중이다. 또 인텔은 지난 10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 방문 당시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해 베트남과 새로운 공급망 구축 방안을 논의했다. 인텔은 베트남 남부에 반도체 조립·테스트 공장을 두고 있다.

지난 4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만나고 있는 모습./엔비디아 제공

엔비디아는 인도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이달 초 닷새 일정으로 인도 내 주요 4개 도시를 방문하고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비롯한 주요 기업 인사들을 만났다. 황 CEO는 이곳에서 “인도엔 방대한 데이터와 인재가 있다”며 “세계에서 가장 큰 AI 시장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 정부가 대중 첨단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인도가 엔비디아 제품의 수요를 끌어올릴 대안 기지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이미 인도 IT 산업의 중심지인 벵갈루루와 수도 뉴델리 외곽 신도시인 구르가온 등 4곳에 엔지니어링 센터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4000명에 달한다. 이는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엔비디아의 인재 풀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황 CEO는 이번 여정에서 인도 인력 전체를 재교육하고 인도 데이터와 인재를 활용해 미래 AI 모델을 구축하는 사업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간 인도 최대 대기업 릴라이언스는 자사 통신 플랫폼에 엔비디아의 슈퍼컴퓨팅 기술을 사용해 인도 내 AI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체 시장을 고민하는 거대 기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중국 시장 의존도를 줄이는 덴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중국은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의 3분의 1을 담당했다. 인텔은 지난해 총 매출의 27%를 중국 시장에서 올렸고, 엔비디아 역시 중국 매출이 전체의 25%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발 반도체 수요는 여전하다. 전날 대만 IT 전문 매체 디지타임스는 인텔이 미국의 대중 제재를 피해 내놓은 중국 시장용 AI 칩 ‘가우디2’가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용 AI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A800과 H800 역시 제때 구하기 어려워 암시장이 활개를 칠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들 기업도 미 정부의 대중 제재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겔싱어 CEO와 황 CEO는 지난 7월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 등과 함께 바이든 행정부를 찾아 수출 통제 확대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엔비디아가 미래 시장으로 점찍은 인도가 엔비디아 칩의 생산기지로까지 부상하는 건 어려울 것이란 예측이 많다. 인도 정부는 최근 수십억달러의 보조금을 투입해 반도체 제조 인프라 구축에 시동을 걸고 있지만, 엔비디아와 인텔 반도체처럼 정교한 칩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갖추기엔 한참 멀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