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4월 칭화유니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신화연합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가 심화하는 와중에 중국이 보란 듯이 반도체 자급자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가 인공지능(AI) 반도체용 초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자체 생산을 추진하고 나선 데 이어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가 중국산 5G(5세대 이동통신)칩을 탑재한 휴대폰을 내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중국은 반도체 생산 능력 확보를 위해 한국의 기술과 인력을 무분별하게 탈취하고 있어 우리의 경쟁력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5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최근 HBM 자립을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HBM은 챗GPT 같은 초거대 AI 구동에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달 30일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이 HBM 선두 기업인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을 따라잡는 것은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중국 정부는 수년이 걸리더라도 HBM을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HBM 자립에 희망으로 떠오른 기업은 중국의 주요 D램 제조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다. 중국 반도체 업계는 HBM 생산에 중국으로 수출길이 막힌 EUV(극자외선) 장비 등 첨단 노광 기술이 필수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기에 4년 안에 자체 HBM을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화웨이는 지난달 말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의 방중 기간 새 스마트폰 ‘메이트 60′을 공개했다. 업계에선 이 스마트폰에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가 제조한 7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급 신형 칩 ‘기린 9000s’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블룸버그는 지난 1일 이 휴대폰을 테스트한 결과 통신 속도가 최신 아이폰에 가까웠으며 다른 5G 휴대폰과 유사한 대역폭을 보였다고 전했다. 미 제재로 2019년부터 5G 칩을 수입하지 못하고 있는 화웨이가 5G 휴대폰을 내놓자, 중국 국영 환구시보는 “미국의 극단적인 억압이 실패했다는 걸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현재 화웨이는 이 휴대폰의 구체적인 프로세서 사양과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역대 가장 강력한 모델”이라고 광고하며 판매 중이다.

반도체 전문 분석업체 테크인사이츠는 이번 개발을 두고 “미국 뺨을 때리는 일”이라며 “이 칩은 (중국이 미국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봐라.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평했다. 테크인사이츠는 화웨이의 ‘메이트 60 프로’ 메인 프로세서가 최신 글로벌 기술보다 2세대 뒤쳐져 있다면서도, SMIC의 기술 발전이 가속화하고 있고 7나노 기술 수율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화웨이의 '메이트 60 프로' 스마트폰./화웨이 제공

중국은 글로벌 제재 강화에 대비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를 대거 구입하고 있다. 중국 세관 자료에 따르면 올 1~7월 중국이 수입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DUV(심자외선) 노광장비 규모는 작년보다 64.8% 증가한 25억8000만달러(약 3조4000억원)에 달했다. 중국은 2019년부터 미 제재로 ASML의 최첨단 EUV 노광장비를 들여오지 못하고 있다. 대신 상대적으로 구형 장비에 속하는 DUV를 구매해 왔다. 그러나 내년 1월부터는 DUV 장비 수입마저 막힐 가능성이 커지자 미리 사재기에 나선 것이다. 현지 언론은 중국이 DUV 장비 개발에 나서고 있어 올해 말 이를 자체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반도체 자립을 꿈꾸는 중국의 움직임에 한국이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은 한국을 비롯해 대만 등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는 국가에서 기술을 탈취하고 기술자를 빼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 우리 기업과 국가 경쟁력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술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반도체 산업을 키우려는 중국의 접근법이 기술 탈취와 인력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중국 업체들은 국내 핵심 반도체 연구원들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중국이 반도체 자립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반도체와 반도체 장비 생산에는 양질의 부품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글로벌 공급망이 필수적인데, 현재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이 이 공급망을 뚫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를 선언하고 반도체 산업에 1조위안(약 181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업계에서는 2025년까지도 자급률은 30%에 못 미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 전문연구원은 “디스플레이 산업을 세계 1위로 성장시킨 중국으로서는 이와 유사한 생태계를 가진 반도체 산업도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면 불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라며 “그러나 미국이 철저하게 외국 기업의 대중 투자까지 통제하고 있어 중국 내 반도체 산업 성장은 지연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