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자사 MR(혼합현실) 헤드셋 ‘비전프로’를 위한 소프트웨어 생태계 판 짜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각) 애플은 비전프로 앱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비전프로 대여를 시작했다. MR 헤드셋 시장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용자가 즐길 만한 MR 콘텐츠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해당 소식이 전해진 지 일주인 만에 이번엔 디즈니 산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 디지털 콘텐츠 제작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그래픽 디자인·설계 소프트웨어 기업 오토데스크와 연합체를 발족했다. 3D 콘텐츠 산업 활성화를 위해 뭉친 것이다. 애플은 내년 1~3월 중 미국에 비전프로를 출시한 뒤 출시국을 늘려갈 계획이며, 현재 비전프로의 보급형 모델을 포함한 차세대 모델 개발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드웨어 개발과 함께 소프트웨어, 콘텐츠 다양화에도 박차를 가해 MR 생태계를 완성한다는 전략이다.
◇ 비전프로용 OS·앱 개발 착수한 애플, 이제 ‘쉽게 3D 콘텐츠 만드는 길’ 연다
애플은 지난 1일 픽사, 어도비, 엔비디아, 오토데스크와 ‘오픈USD를 위한 연합체(AOUSD·Alliance for OpenUSD)’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오픈USD의 범용성을 높이는 게 이 연합체의 지향점이다. 오픈USD(Open Universal Scene Description)는 픽사가 2012년 개발, 2016년 오픈소스로 배포한 3D 기술 언어다. 업계에서는 오픈USD가 인터넷의 HTML처럼 메타버스 시대의 표준 사양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 IT 전문매체 나인투파이브맥은 “쉽게 말해, 창작자들이 다양한 도구로 3D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라며 “특히 픽사와의 협업으로 애플의 공간 컴퓨팅 플랫폼(비전프로)에 역동적인 3D 콘텐츠들이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인투파이브맥은 해당 연합체에 어도비가 참여한 점에도 주목했다. 나인투파이브맥은 “어도비는 최근 공개한 포토샵 베타 버전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생성형 AI(인공지능)를 활용하는 데 적극적이다”라며 “(3D 콘텐츠 제작에서) 사람의 창의력과 AI 기술의 결합은 굉장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애플은 앞서 비전프로 대여를 시작하며 본사가 위치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와 영국 런던, 독일 뮌헨,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 싱가포르에 ‘개발자 랩’을 열었다. 애플은 비전프로 대여 및 랩 운영을 통해 비전프로용 운영체제(OS)와 호환을 위해 앱이 갖춰야 할 조건들을 개발자들과 공유하고, 개발자들이 만든 앱이 비전프로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비전프로를 위한 OS, 앱 개발에 본격 착수한 것이다.
◇ 메타 고전에 시들해진 XR 시장… ‘생태계 조성 전문’ 애플 등판에 삼성 긴장
MR은 물론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기기의 성패는 앱, 콘텐츠 등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크기에 달려 있다. 2014년 빅테크 기업 중 가장 먼저 시장에 뛰어든 메타가 10년째 적자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이 생태계 구축에 실패하며 기기의 대중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타 관련 사업부인 리얼리티랩스는 실적을 처음 공개한 2020년 4분기 이래 올해 2분기까지 누적 적자 337억달러(약 43조7156억원)를 기록했다.
선두업체인 메타가 주춤하면서 XR(확장현실)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다. XR은 MR과 AR, VR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 XR 헤드셋 출하량은 전년 동기 대비 33% 감소했다. 업계가 애플의 참전을 기다려온 이유다. 업계는 자체 OS(iOS), 앱 장터(앱스토어) 등 소프트웨어 생태계 확대 전략을 통해 아이폰 등 하드웨어 사업을 키워온 애플이 비전프로에도 동일한 성공 방정식을 도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더욱이 애플은 이미 수억명의 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CNN은 애플이 지난 6월 비전프로를 공개한 직후 “(XR 산업 성장 전망에 대한) 시장의 회의론이 틀렸다고 입증할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그건 애플뿐”이라며 “엄청난 고객 기반이 있는 애플의 진입은 XR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AR·VR 시장이 내년 3580억달러(약 464조3976억원) 규모에서 2030년 1조5000억달러(약 1945조5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애플이 비전프로를 위한 소프트웨어 생태계 구축에 돌입하면서 선발주자인 메타와 후발주자인 삼성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메타는 애플이 비전프로로 프리미엄 시장에 먼저 진출하는 사이 보급형 시장을 장악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오는 9월 27일 공개할 신형 헤드셋 ‘퀘스트3′의 출고가를 최저 499달러(약 65만원)로 책정했다. 비전프로의 출고가는 3499달러(약 455만원)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6일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업계 다른 기업들이 MR을 시장에 가져오려 하고 있지만, 퀘스트3는 많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초의 주류 기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소프트웨어 생태계 조성과 하드웨어 개발을 동시에 추진 중이다. 올해 2월 구글, 퀄컴과 손을 잡았다. 삼성이 XR 기기, 구글이 소프트웨어, 퀄컴이 칩셋을 만드는 형태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파트너사 협업과 더불어 내부 개발도 병행한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해 XR 기기용 디스플레이 개발을 전담하는 팀을 꾸렸고, 삼성전자는 올해 디바이스경험(DX)부문 산하에 신기술 및 새로운 폼팩터(기기 형태)를 개발하는 미래기술사무국을 신설했다. 삼성은 당초 지난달 신제품 공개 행사 ‘언팩’에서 XR 헤드셋을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애플의 비전프로 발표 이후 공개 시점을 내년 초로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