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운영하고 있는 중국 내 생산공장에도 예외없는 제재를 단행할 전망이다. 한시적으로 제재에 대한 면제 특권을 받았던 두 기업도 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이나 공정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 다롄 등에서 각각 낸드플래시, D램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중국 반도체 제재에 따라 앞으로 중국 공장의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해질 것을 대비해 대응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특히 D램 생산량 절반을 중국 우시 공장에 의존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타격이 예상된다. 중국 공장의 운영 차질이 이어질 경우 장비를 국내 이천, 청주 등으로 옮기거나 설비를 추가 투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급 로비에도 꿈쩍않는 美 정부… ”아무것도 안통해”
앞서 미 상무부는 지난해 10월 중국 내에서 생산되는 8㎚ 이하 D램과 128레이어(단) 이상 낸드플래시 메모리칩, 16㎚ 이하 로직칩 기술과 생산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중국 현지에 생산기지를 둔 다국적 기업에 관해서는 건별 허가를 받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서는 1년간 수출을 포괄적으로 허용한 바 있으며, 한국 정부와 두 기업은 현재 반도체 수출통제 유예를 연장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전날 앨런 에스테베스 미 상무부 산업안보 차관은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워싱턴DC에서 개최한 한미 경제안보포럼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제공한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1년 유예가 끝난 후 “기업들이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수준에 한도를 둘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는 그간 예외적으로 한국 기업들에 부여했던 특혜를 중단하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 미국 정부와 의회를 대상으로 역대급 로비를 펼쳐온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반도체 산업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겠다는 미 당국의 입장은 꿈쩍도 하지 않는 분위기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합법적인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전혀 통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중국 반도체 산업의 첨단화를 차단하겠다는 미 정부, 의회의 방침이 너무 견고하다”고 설명했다.
◇운영도, 매각도, 탈출도 힘들다… 삼성·SK하이닉스 ‘사면초가’
‘기업들이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수준에 한도를 둘 것’이라는 미 정부의 답변은 사실상 최선단 메모리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등 최첨단 장비 반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기존에 운영하고 있는 장비에 대한 유지·보수도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공장의 낙후화 혹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탈중국 시나리오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우선 SK하이닉스다. 회사의 최대 매출 품목인 D램, 그 중에서도 생산량의 약 50%를 담당하는 우시 공장의 생산성이 떨어질수록 회사의 매출, 영영업이익에 적잖은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보다 SK하이닉스쪽의 타격이 큰 이유는 D램의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D램은 공정 노드가 한, 두세대 뒤처질수록 생산성이 20~30% 이상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며 “생산단가 절감을 위해 우시 공장의 생산능력을 수년에 걸쳐 확대해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시 공장의 생산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삼성, 마이크론 등 경쟁사에 비해 원가절감 경쟁력이 불리해진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가 인텔로부터 인수한 솔리다임의 중국 다롄 낸드플래시 공장 역시 골칫덩이로 떠올랐다. 현재 해당 공장의 3D 낸드 공정은 SK하이닉스의 청주 M15, M11 공장 등에 비해 뒤처진 구공정 장비를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장비 교체가 시급한 상황이다. SK하이닉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해당 공장의 가동률이 크게 하락한 상태이며, 월 평균 웨이퍼(반도체 원판) 투입량 역시 기존 8~9만장 수준에서 일부 하향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삼성전자 시안 공장 역시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현재 중국 시안 공장에서는 한국보다 1~2세대 뒤처진 V6 공정(6세대 공정)으로 3D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다. 국내 최대 3D 낸드플래시 생산지인 평택공장의 경우 지난해 더블스택(셀을 2단으로 쌓은 뒤 이어 붙이는 방식) 기술을 안정화시켜 200단대를 돌파했지만, 시안 공장에는 미국 제재에 따라 더블스택 기술 자체를 도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더블스택 기술을 안정화해 거침없이 200단대를 돌파한 마이크론, 키옥시아, SK하이닉스에 비해 낸드플래시 사업의 생산성이 크게 악화될 수 밖에 없다.
한편 SK하이닉스가 지난해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최악의 시나리오 대비책’으로 언급했던 중국 현지에서의 장비 매각 또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대 중고 반도체장비 플랫폼 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의 김정웅 대표는 “현재 운용 중인 장비 상당수가 미국 제재 품목에 걸려있다”며 “매각 작업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으며 장비를 국내로 옮기는 것도 당국 허가 문제가 걸리기 때문에 장기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