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수요 절벽 속에서도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 신드롬이 일면서 막대한 현금을 쌓아놓은 반도체 공룡들이 AI 스타트업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스타트업 투자 빙하기를 맞아 대다수 스타트업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애플, 인텔, AMD, 엔비디아, 삼성전자 등이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단행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24일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올해 최소 두 개 이상의 AI 반도체 스타트업이 대형 기업으로 매각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옴디아의 고급 컴퓨팅 부문 알렉산더 해로웰 수석 애널리스트는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받는 AI 칩 스타트업들은 시장 선두주자인 엔비디아와 비슷한 수준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대형 반도체 기업으로의 매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도 최근 챗GPT 열풍과 함께 다수의 AI 반도체 기업들이 주목 받고 있지만, 이 회사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스타트업 민관협력 네트워크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2022년 하반기(7~12월) 스타트업 시장에 몰린 돈은 3조7751억원이다. 전년 같은 기간(7조2184억원)과 비교하면 47.7% 감소했다. 올 들어서도 분위기가 다르지 않다.
이 같은 상황에 막대한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대형 IT·반도체 기업들은 챗GPT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AI 서비스 수요 대응을 위해 M&A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삼성전자는 약 900억달러(116조원)의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애플은 230억달러(29조원), 아마존은 350억달러(45조원), 인텔, 엔비디아, AMD는 약 100억달러(13조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대형 기업들이 AI 스타트업 인수에 나설 것으로 관측되는 이유는 AI 시스템 구동의 핵심적인 신경망 처리장치(NPU) 기술 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AI 스타트업이 개발해온 NPU는 말 그대로 인간의 신경망과 같은 구조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프로세서를 말한다. 중앙처리장치(CPU)나 GPU는 입력되는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폰노이만 아키텍처’를 가지고 있지만 NPU는 동시다발적인 행렬 연산에 최적화된 프로세서로 여러 개의 연산을 실시간 처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기존에 AI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GPU(그래픽처리장치)는 애초에 AI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세서가 아니다. GPU로 생성 AI나 초거대 AI 처리를 하기 위해서는 코어 수를 늘려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격이 높아지고 전력 소모가 커진다. 프로그램을 돌리기에도 무거운 형태가 된다. 효율성이 낮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대형 기업들은 최근 수년간 급성장하는 AI 반도체 수요를 겨냥해 크고 작은 M&A를 단행해왔다. 인텔의 경우 2019년 말 이스라엘 AI 반도체 스타트업 하바나랩스를 20억달러에 인수한 이후 본격적으로 AI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5월엔 하바나랩스가 개발한 2세대 프로세서 ‘가우디2′를 출시했다. 연산 속도가 하바나의 기존 AI 칩보다 두 배 빨라졌다. 인텔은 엔비디아의 ‘A100′과 비교해도 대등한 성능을 보인다고 자평하고 있다.
GPU 시장 2위 AMD도 지난해 2월 500억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업체인 자일링스를 인수했다. 지난 몇년간 반도체 업계 최대의 빅딜 중 하나로 꼽힌다. FPGA는 용도에 따라 설계를 바꾸는 반도체다. 일반 반도체에 비해 가격은 높지만 반도체를 새로 구입하지 않고 업그레이드만 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일각에서는 FPGA가 기존 AI 연산에 사용되고 있는 GPU보다 더 효율적인 AI 반도체라는 의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