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공정이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와 같은 최선단 공정만 있는 건 아니다. 시장 절반 수준이 여전히 28㎚ 이상의 레거시(구공정)가 차지하고 있는데, 주요 기업은 선단 공정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공급망 공백을 메우는 것이 서플러스글로벌의 역할이다.”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지난 7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중고 반도체 제조 장비 유통 분야 세계 1위 기업 서플러스글로벌의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 6만8000㎡(약 2만1000평) 규모의 클러스터 내부 전시장에는 대당 800억원을 호가하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ASML의 심자외선(DUV)부터 1500대 이상의 크고 작은 반도체 장비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4, 6, 8, 12인치 등 종류를 망라한 웨이퍼(반도체 기판) 장비가 여느 반도체 팹(공장) 못지않게 들어차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는 “반도체 장비 수명이 30년 이상인데 그냥 버려지는 중고 반도체 장비가 너무 아까웠다”며 “중고 장비를 잘 활용하려면 인프라가 한군데 모여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 이런 공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웬만한 장비는 여기 다 있다”며 “전 세계 반도체 팹이 끊김없이 생산을 이어가려면 공급망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미 무너지고 있는 레거시(구공정) 장비 공급망 재구축에 우리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했다.
전시장 옆방에서는 반도체 장비의 성능을 테스트하는 클린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클린룸 한 곳의 월 전기료는 무려 5000만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출신의 전문 엔지니어들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전 세계에서 매입해 온 중고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점검한다. 현재 운영 중인 클린룸은 6개로, 조만간 대형 반도체 업체들도 이곳에 입주해 클린룸은 15개까지 늘어날 예정이다. 클린룸 작동 현황을 모니터로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앙 운영통제실에도 직원 10여명이 머물며 전체 클러스터를 원격 관리하고 있었다.
◇ 주목받는 선단 공정 대신 구형 공정 생태계 집중
이 회사의 정체성은 이름에 다 담겨있다. ‘잉여 재고’와 ‘흑자’라는 뜻을 모두 가진 단어 ‘서플러스’(surplus)에 ‘글로벌’(global)을 더해 ‘재고를 전 세계에 팔아 흑자를 낸다’는 의미가 탄생했다. 2000년 B2B(기업 간 거래) 중고 사업으로 첫발을 뗀 서플러스글로벌은 지난 20여년간 전 세계 반도체 공장, 장비 제조사 등 반도체 기업 4000곳과 4만대 이상의 반도체 장비를 거래해왔다.
이름처럼 서플러스글로벌은 삼성전자부터 대만 TSMC, 미국 글로벌파운드리 등 반도체 제조업체에서 중고 장비를 매입한 뒤 자체 정비를 거쳐 전 세계 반도체 팹에 판매한다. 원가의 20% 정도로 가치가 급락하는 중고 장비를 사들여 수리한 뒤 원가의 40~70% 가격으로 되판다. 단순히 장비만 파는 게 아니라 고객 요구사항에 따라 장비를 재(再)제조하거나 단종된 부품의 경우 새롭게 개발해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전 세계 수요가 적지 않아 고객사는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미국, 유럽 등에 고루 분포해있다.
모두가 선단 공정을 향해 돌진할 때 서플러스글로벌은 오히려 구공정 반도체 생태계에 주목했다. 김 대표는 “전 세계 반도체 매출 가운데 여전히 40%가 레거시 공정에 속한다”며 “그러나 과거 전 세계에 반도체 장비를 공급해왔던 글로벌 장비 업체들은 저렴해진 구형 장비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고, 장비가 점점 다양해지면서 단종 부품도 늘어나 공급망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5000억원짜리 장비만큼이나 몇천만원에 불과한 장비도 반도체 공정에 꼭 필요한 경우가 많다”며 “누군가는 이 공급망이 뚫리지 않게 레거시 인프라를 받쳐줘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를 포함한 전 세계 1000여개의 리퍼비셔(중고 장비 업체)가 빈 곳을 메꾸고 있다”고 했다. 1000여개가 넘는 중고 장비 유통 회사들을 통합해 세계 공급망을 다시 구축하는 게 서플러스글로벌의 목표다.
공급망을 제대로 갖추려면 장비 유통과 수리, 소프트웨어 개발, 데모(시범 운영) 등이 한 곳에서 모두 가능해야 한다고 본 김 대표는 2021년 7월 용인시에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를 조성했다. 1년 반이 지난 현재 이곳은 반도체 소부장 기업이 모이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ASML, KLA 등의 트레이닝 센터를 비롯해 여러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리퍼브 센터와 데모 센터 등이 들어서는 중이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간 연구 개발이나 인력 양성 사업 등의 협력도 이곳에서 가능하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 반도체 박사학위를 받더라도 12인치 장비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라며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반도체 중고 장비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면서 원리를 배우는 행정 교육 관련 프로젝트도 기관들과 협력해 준비 중이다”라고 말했다.
◇ 반도체 문외한의 집념으로 이룬 세계 1위
반도체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자처한 이 회사의 수장 김 대표는 아이러니하게도 반도체 문외한 출신이다. 회사에서 무역 관련 업무를 하던 김 대표는 30대 중반 “더 재밌는 일을 해보자”며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특정 시장을 공략하지 못한 채 중구난방으로 사업을 벌였다. 건설 기계부터 냉동 돼지고기까지 닥치는 대로 팔았다. 김 대표는 “곳곳에서 겨우 빌려 모은 종잣돈 23억원을 몇 년 안 돼 4000만원 남기고 다 잃었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목표 시장을 좁히자 길이 보였다. 2000년대 초반 당시 연평균 15%씩 성장하던 전자 산업에 희망을 건 김 대표는 저렴한 중고 전자 장비 거래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는 “일주일에 100시간씩 미친 듯이 일하면서 사업에만 몰두했다”고 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에 전념하니 새로 진입하는 장비 시장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1등을 꿰찼다.
김 대표는 산업 구조조정이 있을 때마다 기회를 잡았다. 그는 “2002년 한국 인터넷 접속 장비가 전화에서 브로드밴드로 바뀌는 시기에 유휴 장비가 남아돈다는 한 회사의 기사를 접하고 무작정 찾아가 재고를 다 팔아주겠다고 큰소리쳤다”며 “근데 알고 보니 한국 외에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전화 접속 장비를 쓰고 있어 이 장비를 미국, 유럽, 온두라스 등 곳곳에 내다 팔면서 돈을 모았다”고 했다. 또 당시 국내 30개 넘는 핸드폰 제조사들이 전부 문을 닫으면서 나온 중고 장비를 중국에 팔아 큰돈을 만졌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2005년부터 본격 반도체 장비 사업에 발을 들였다. 반도체 시장이 성장하면서 회사 매출도 300억원까지 순탄하게 늘었으나 2009년 금융위기로 위기를 맞았다. 시장이 무너지면서 중고 장비가 쏟아져 나왔다. 모두 장비를 내다 팔 때 김 대표는 반대로 빚을 내 장비 수천대를 사들였다. 그는 “남들이 공포에 질렸을 때, 시장이 바닥일 때가 바로 기회다”라고 했다. 회사는 2010년 매출 500억원, 2011년 700억원을 찍으며 급성장했다.
현재까지 매년 10%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해 온 서플러스글로벌의 직원은 5명에서 230명으로 늘었다. 올해 매출 목표는 3000억원 이상. 지난해 2400억원에서 30% 넘게 높여 잡은 수치다. 김 대표는 “불황일 때 오히려 공격적으로 가는 게 회사의 기조다”라며 “소량 다품종 다고객 회사라 몸이 고생을 많이 하지만, 레거시 반도체 생태계에서 핵심 기업이 돼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