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2월 4일 고 이병철(왼쪽) 삼성 창업회장이 삼성반도체가 태동한 경기도 부천공장을 돌아보고 있다. 이병철 회장 뒤쪽으로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서있다. /삼성전자 제공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 산업에 투자해야 생존할 수 있다.” 40년 전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강조한 정신이다. 삼성전자(005930)의 주력인 반도체 사업은 세계 1등이 됐지만 최근 초유의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전 세계 주요국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하며 한국 반도체 위기론까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선행 투자’ 전통을 이어가며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1분기 반도체 적자 예상에도 “투자 이어가 미래 준비”

독자적인 반도체 기술을 키우겠다는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이 4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삼성은 역대 최악의 반도체 시장 혹한기를 지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에 따른 전례 없는 수요 감소로 삼성전자의 지난해 4분기 반도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97% 급락한 2700억원에 불과했다. 30년 연속 세계 1위를 지켜온 메모리반도체 사업이 재고 급증과 가격 하락으로 적자를 낼 정도로 크게 부진했던 탓이다.

한국 반도체의 미래 먹거리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은 그나마 업황이 나아 상대적으로 선방했으나, 세계 1위 기업 대만 TSMC와의 점유율 격차는 좀처럼 줄이지 못하고 있다. 9일 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 56.1%, 삼성전자 15.5%로 두 회사의 간 격차는 40.6%포인트로 집계됐다. 이마저 올해 상반기에는 TV·PC 등의 수요가 더 위축되면서 파운드리 사업 실적도 악화할 전망이다. 시장에서는 올해 1분기 삼성 반도체 부문 전체 실적이 15년 만에 적자 전환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이런 상황을 두고 삼성전자는 오히려 ‘미래를 준비할 기회’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업 환경이 어렵더라도 투자를 줄이지 않고 정면 돌파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잇따라 투자 비용을 전년 대비 최대 절반 수준까지 줄이겠다고 공식 발표한 것과 정반대 행보다.

경계현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사장은 지난 1일 “업계 전반적으로 투자 축소 움직임이 있지만 삼성전자는 미래를 위해 투자 축소를 하지 않는다”며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 메모리 사업 분야에서 초격차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 반도체 수요의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삼성전자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도 지난달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미래를 철저히 준비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올해 캐펙스(CAPEX·시설투자)는 전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R&D(연구개발) 비율도 늘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등 미래 수요 대비, 기술 리더십 지속 강화를 위한 중장기 차원 투자를 지속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삼성 반도체 전체 시설 투자 규모는 47조9000억원이다.

◇ 이재용 “선제 투자해 초격차 기술 확보” 강조

이처럼 선제적인 투자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전략은 삼성 DNA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병철 창업주의 선행 투자 정신을 이어받은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후 여러 차례 “투자를 통해 세상에 없는 기술을 확보하자”고 강조해왔다. 지난 7일에도 충남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을 찾아 “끊임없이 혁신하고 선제적으로 투자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키우자”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7일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찾아 QD-OLED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선행 투자 기조에 따라 삼성전자는 R&D를 비롯한 미래 사업 투자를 지속해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우선 2025년 가동 예정인 반도체 R&D 전용 라인을 포함해 2028년까지 연구단지 조성에 약 20조원을 투자한다. 또 2030년까지 한국이 취약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 170조원 이상을 투자하는 계획도 차질 없이 진행할 예정이다. 아울러 국내외를 망라해 전 세계 고객 대응을 최적화할 수 있는 신규 생산 거점도 추가로 확보해나가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달러(약 21조3800억원)를 투자해 2024년 4㎚(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 양산을 목표로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 “한국 반도체 재도약 위해선 정부 지원 필수”

반도체업계는 한국 반도체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업 투자뿐 아니라 정부 지원도 빠르게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주요 반도체 경쟁국은 통 큰 지원으로 자국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으나, 한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안은 걸음마 단계다. 미국, 대만 정부가 반도체 지원 규모를 늘려온 데 이어 최근 일본 정부도 10년 이상 자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 국적과 상관없이 설비 투자액의 최대 3분의 1을 보조하는 지원책을 내놨다. 이 와중에 한국의 반도체 세액공제 개정안(공제율 25%)은 여전히 정쟁에 휘말려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도쿄선언 후 6개월 만에 삼성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메모리(64K D램) 개발을 할 수 있었던 데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매우 큰 몫을 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이 전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을 자국에 끌어모으고 있는 것처럼 한국이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쥐려면 취약한 시스템반도체 육성 등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반도체 산업 지원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며 “아까운 골든 타임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