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를 둘러싼 정보기술(IT) 업계의 기대가 다시 커지고 있다.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박람회 CES 2023에는 사상 처음으로 메인 전시장에 메타버스 전용 공간이 등장했다.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애플도 올해 첫 혼합현실(MR) 헤드셋을 출시한다. 메타버스 플랫폼 대장주 격인 로블록스의 지난달 일간 활성 사용자 수는 6150만명으로 전년 동기(5210만명) 대비 18% 뛰었다.
기세를 몰아 최근 미국, 태국에 이어 한국에 진출한 메타버스 플랫폼도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메타버스 갤러리’를 표방하는 스페이셜이다. 2017년 설립된 스페이셜은 보그, 엘르, 위블로, 크리스티 등 브랜드들과 협업하며 패션·예술 분야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2020년 우버, 인스타그램 창업자를 비롯해 카카오벤처스, 삼성넥스트, LG테크놀로지벤처스 등으로부터 170억원 규모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한 이래 현재까지 600억원가량의 투자액을 모았다.
이진하 스페이셜 공동창업자 겸 최고제품책임자(CPO)를 지난 26일 화상으로 만났다. 1987년생인 이 CPO는 경기과학고를 수석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 이후 매사추세츠공대(MIT) 건축학대학원 산하 미디어랩에서 예술·과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MIT 미디어랩 시절엔 모니터에 손을 넣어 조작할 수 있는 컴퓨터 스페이스탑(SpaceTop), 만질 수 있는 3차원(3D) 픽셀 제론(ZeroN)을 개발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28세의 나이에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인터랙션그룹을 설립, 최연소 수석연구원과 그룹장을 역임했다.
이 CPO는 실리콘밸리가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대유행) 이후에도 메타버스의 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소속의 욕구’에서 찾았다. 그는 “메타버스 출현의 저변에는 무리를 지어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있다”며 “이제까지는 기술의 한계로 이 본능을 온라인 세계에서 실감 나는 형태로 구현하지 못했지만, 정말 머지않은 미래에 가능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이 CPO와의 일문일답.
一 MIT 미디어랩에서 만든 게 스페이스탑과 제론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완전히 융합된 미래를 꿈꾸다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에 이르게 된 건가.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결과물을 도출하는 행위보다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감 때문이다. 나와 내가 다루는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몰입의 경험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쓰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서는 이런 경험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한계를 기술로 넘어설 것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온라인이 대세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면 오프라인의 장점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게 맞는다고 결론 내렸다. 언젠가는 스페이스탑이나 제론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말 그대로 ‘무너뜨리는’ 제품이 상용화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기술 수준을 고려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기로 했다.”
一 스페이셜 창업 전 삼성전자에 몸담은 것도 그 단계의 하나였나.
“그렇다.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과 같은 기술이 고도화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그 전에 디스플레이 스크린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해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TV도 공간이다’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TV 자체도 공간이고 TV가 놓인 곳도 거실이라는 공간이지 않은가. 공간은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즉, 혼자만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보다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것이다.
그다음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생각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CES 2016에서 선보인 미디어스퀘어(MediaSquare)다. 미디어스퀘어 환경에서는 누구나 TV에 스마트폰을 연결해 사진, 비디오,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할 수 있다. 각자 가고 싶은 음식점을 골라 TV 화면에 띄워 놓고 저녁 메뉴를 고를 수도 있다. 아쉽게도 상용화되진 않았지만 개념은 스마트TV 곳곳에 스며들었다.”
一 AR·VR은 글로벌 빅테크인 메타도 고전하는 영역이다. 여전히 전망이 밝다고 생각하나.
“AR·VR의 시대가 오는 건 확실하다. 사람들은 정보를 소화하는 걸 넘어 경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AR 기술이 ‘제대로’ 구현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MR 기술은 ‘곧’이라고 본다.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과 한 회의실에 나란히 앉아 회의하는 상황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은 0%라고 생각한다.”
一 AR·VR이 보편화되는 시기에 대비해 스페이셜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사용자가 스페이셜에서 하는 모든 경험에 걸림돌이 없도록 ‘최적화’에 집중하고 있다. 최적화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정밀한 그래픽을 부하가 적게 걸리도록 로드하기 위한 시스템 최적화가 있겠다. 여러 대역폭에 맞춰 그래픽을 순차적으로 로드하거나, 저화질로 먼저 로드한 뒤 고화질로 전환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스페이셜은 대작 게임 수준의 그래픽을 웹에서 구동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두 번째는 디자인 최적화다. 관련 특허도 많이 취득했다. 온라인 경험이 오프라인 경험과 비교했을 때 위화감이 없어지려면 그래픽도 사실적이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이건 뭐지’ ‘이건 어떻게 하지’와 같은 장벽이 없어야 한다. 한 번의 클릭으로 웬만한 건 다 돼야 한다는 소리다. 이는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운영되는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돌발 상황을 고려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 플랫폼이 3차원(3D) 환경을 지원한다면 생길 수 있는 변수가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一 얼마 전 맥도날드가 스페이셜에 체험관을 열었던데, 국내 기업들의 러브콜도 적지 않을 것 같다.
“현재 스페이셜의 누적 사용자 수가 약 350만명이다. 브랜드 및 개인 창작자를 제외하면 절반가량이 20대 중반이다. 내부에서는 스페이셜의 섬세한 그래픽, 실사와 비슷한 아바타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기존 메타버스 플랫폼들은 그래픽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데다 만화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아바타를 내세워 ‘10대들의 놀이터’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스페이셜은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판단에서다. 국내 기업의 시각도 비슷하다. 구체적인 명단을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앞서 시리즈 투자에 참여한 기업 중 일부와 협업 논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