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보 우려를 이유로 반도체, 인공지능(AI) 분야 중국 기업에 대한 수출 통제를 발표했다. 기술 패권 경쟁에서 ‘중국 견제’ 고삐를 더욱 죄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코로나19로 가속화 된 초격차 기술 경쟁은 세상을 바꿔놨다. 이러한 변화는 대한민국도 예외일 순 없다. ‘지배를 할 것이냐, 지배를 당할 것이냐.’ 디지털 자주권을 놓고 정보통신기술(ICT) 현장에서 치열하게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3040엔지니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미국, 중국, 한국 등 전 세계에서 초거대 인공지능(AI) 기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승패를 따지자면 한국에 남은 시간은 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3년도 길게 잡았다. 지금 AI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디지털 자주권’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랩 소장은 지난 19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초거대 AI 기술 수준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초거대 AI는 대용량 데이터를 학습해 마치 인간처럼 생각하며 추론, 판단이 가능한 차세대 AI를 말한다. 영국 옥스퍼드 인사이트(Oxford Insights)는 ‘정부 AI 준비지수 보고서’를 통해, 한국 정부의 AI 기술 수준을 7위로 평가했다.
◇ AI 자주권, 지금부터 확보해야
하 소장은 “AI 시장에서 자주권을 잃는다는 의미는 현재의 검색 시장을 보면 예측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 많은 국가의 검색 시장이 구글에 잠식 당했지만, 한국만은 여전히 네이버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인터넷 검색 시장이 형성되던 시절, 네이버가 죽어라 노력해 검색 기술을 고도화 하면서 디지털 자주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초거대 AI는 정치, 사회, 문화 등 인간의 삶 곳곳에 접목될 수 있다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데,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미래 많은 분야에서 외국 기업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7위 수준을 지키고 있지만, 여기서 3위권 내로 치고 올라갈 것이냐, 아니면 20위권 밖으로 밀려날 것이냐가 대한민국 AI의 현 주소라는 얘기다.
하 소장은 한국이 AI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 확보를 위한 조건으로 ▲A I반도체 국산화 및 소프트웨어(솔루션) 동시 개발 ▲데이터 표준화 체계 ▲인재 확보 등을 꼽았다.
초거대 AI는 대용량의 학습 데이터를 단시간에 받아들이고 이를 처리해 추론하는 과정을 거치는 데, 기존 기술로는 속도와 전력 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컴퓨터 시스템은 연산장치인 중앙처리장치(CPU)와 메모리가 떨어져 있어, 속도 차이에 따른 병목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AI 반도체는 연산장치를 내부에 두면서, 대규모 연산을 초고속, 초전력으로 실행할 수 있다.
하 소장은 “초거대 AI 시장이 초기에 육성되기 위해서는 성능, 전력 등에 따른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 데, 그 운영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기술이 AI 반도체다”라며 “다만, 현재 엔비디아 등 외국 업체들에 대부분 수입하고 있어, 중장기적으로 AI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AI반도체의 국산화가 필수적이다”라고 했다.
그는 “핵심은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초기 과정에서부터 연구를 같이 할 수 있는 인력 육성, 개발자 솔루션 등을 동시에 함께 개발·발굴해야 한다”라며 “아무리 좋은 신약이라도 의사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성공을 할 수 없듯이, 좋은 AI 반도체를 국산화했더라도 개발자들이 사용하기 불편하다고 생각한다면 산업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이버는 삼성전자(005930)와의 협업을 선택했다. 네이버는 지난달 6일 삼성전자와 AI 반도체 솔루션 개발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실무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초거대 AI 플랫폼 ‘하이퍼클로바’의 개발은 네이버가 담당하고, 병목 현상 해결 등 초거대 AI에 최적화 된 AI 반도체 개발은 삼성전자가 맡는 식이다.
또 하 소장은 초거대 AI 시장 초기, 기술력의 폭발을 위한 데이터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인간의 삶과 여러 산업, 서비스, 장비 등으로부터 관련 데이터가 출력되고 있는데 쳬계적인 정책이 없어, 규칙을 가지고 저장·관리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 회계예산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AI 육성 사업 예산’ 공식 명칭이지만, 기관이나 지자체마다 ‘인공지능 육성 사업’, ‘AI 활성화 대책 예산’ 등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실제 사용한 예산을 찾아보려면 전국 기관들의 관련 예산안을 다 들어보면서 수작업으로 다시 정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결국 시간과 인력이 낭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 소장은 학계에도 유명 인사다. 지난해 AI 관련 글로벌 학회서 100건 이상의 논문을 발표·참여했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2022 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NeurIPS)’에서는 한국인 최초 소셜위원장을 맡았다. NeurIPS는 세계 최대 기계학습(머신러닝) 학회로, 논문 채택률이 약 25%에 불과할만큼 경쟁률이 높다. 현재 논문 발표의 약 30~40%가 네이버 서비스에 직·간접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하 소장은 “기술 개발과 함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게 논문이나 학회 참여인데, 전 세계 AI 인재들에게 한국의 개발 수준을 확실하고 임팩트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한국 AI 톱3 목표…디지털 전환은 기회
네이버 개발조직엔 ‘젊은 리더’들이 대거 포진하게 됐다. 1977년생인 하 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으로 2015년 네이버에 합류해, 네이버의 미래를 만들 AI 선행기술 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카이스트와 산학 교류를 주도하는 공동센터장도 맡고 있다.
하 소장은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이 AI 분야에서 톱3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술을 쌓는 게 목표다”라며 “그게 잘 되려면 한국 AI 기술을 이끌고 있는 네이버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네이버가 글로벌이란 더 큰 시장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국내 AI의 판을 키우는 게 우선 과제다”라고 했다.
하 소장은 세계 최초로 한국어 중심의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네이버는 지난 2021년 말 초거대 AI ‘하이퍼 클로바’를 공개했다. 이는 오픈AI의 GPT-3보다 많은 2040억개의 파라미터(매개변수) 규모다. 초거대 AI는 사람 뇌의 ‘시냅스’와 유사한 ‘파라미터’의 수가 성능을 좌우한다. 반도체의 ‘집적도’처럼 파라미터가 많은 수록 더 많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네이버는 하이퍼 클로바 개발을 위해 700페타플롭스(PF) 이상의 슈퍼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했다. 1PF는 1초당 1000조번 연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현재 하이퍼 클로바는 네이버 검색, 쇼핑, 예약을 포함해 40여개 이상의 서비스에 적용되고 있다. 하 소장은 초거대 AI의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초거대 AI의 핵심은 ‘확장성’이다. 그간 일방적인 ‘명령’ 위주가 아닌 ‘교감하는 대화’가 가능한 AI 서비스의 상용화가 목표인 것이다. 또 ‘텍스트↔텍스트’, ‘텍스트↔이미지’, ‘텍스트↔영상’, ‘텍스트↔음성’ 등 다양한 콘텐츠로 입력과 출력을 할 수 있다. 단답형이 아닌 대화를 주거 받거나 한 번의 텍스트 입력에 작문이나 작곡, 코딩, 그림 등의 결과를 찾아주거나 변환하는 식이다.
이러한 기술을 개발자가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도구인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로 만들면 누구나 새로운 서비스에 하이퍼 클로바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하 소장은 “과거 AI는 특정 서비스를 하기 위해 전용 AI가 필요했다. 예컨대 번역기 서비스는 번역 학습 AI, 얼굴 인식은 얼굴 패턴을 학습한 AI가 필요했다”라며 “초거대 AI는 마치 인간처럼 하나의 두뇌로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는 식이다. 결국 하이퍼 클로바의 기술력이 미래 네이버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라고 했다.
하 소장은 하이퍼 클로바를 통해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방법론 자체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기획을 한 뒤 엔지니어들이 붙어서 3개월 정도 데이터를 쌓고 PoC(개념 검증·프로젝트 시작 전 사업성·기술력 등 검증)를 하는 과정을 거쳤다”라며 “하지만 하이퍼 클로바를 활용하면 기획자가 혼자서 코드 한 줄 없이 초거대 AI를 사용해 몇 시간 만에 PoC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제조업 강국인 한국에서 전통 산업의 디지털 전환 수요가 AI 시장의 큰 기회로 작용할 것으로 하 소장은 전망했다. 하 소장은 “군사적인 목적을 염두해두고 AI를 개발하는 미국과 자국의 정치적 안정을 목표로 안면인식 등 AI를 개발하는 중국의 개발 추진력을 한국이 따라갈 순 없다”라며 “정부가 나서서 ‘AI+X’(인공지능 융합) 분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