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미국 테크기업이 정보기술(IT) 한파 속에서 정리해고를 단행하자 실리콘밸리에 구직자가 넘쳐나고 있다. 비대면 흐름 속 고공 행진하던 이 기업들의 정리해고 소식이 잇달아 들려오면서 IT 종사자들 사이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다. 특히 미국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만난 IT 업계 종사자들은 외국인 근로자 비중이 높은 테크 회사의 경우 해고에 비자 문제까지 얽혀 있어 이들의 구직 활동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입 모아 말했다.
14일 IT업계에 따르면 세계 경기가 악화하는 가운데 코로나19 여파로 상승곡선을 타던 빅테크 기업이 실리콘밸리에서 대규모 인원 감축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인사관리업체 챌린저앤그레이에 따르면 지난 11월 실리콘밸리 등의 테크기업은 5만2771명의 직원을 해고했으며 올해 감원된 직원 수는 총 8만명이 넘는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535% 높은 수치이기도 하다.
메타, 트위터 등 주요 테크기업도 수년간 이어졌던 코로나19 호황과 고성장 끝에 감원을 시작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메타는 지난달 최고경영자(CEO) 서한을 통해 직원 1만1000명 이상을 해고한다고 밝혔다. 이는 메타 전 직원 8만7000여명의 13%에 달하는 규모로 회사 설립 이래 사상 최대 감원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역시 트위터 인수 후 전체 직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3700명을 해고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도 지난달 중순부터 1만명 규모 감원을 시작했다. 이외에도 시스템장비업체 시스코, 온라인결제업체 스트라이프 등 테크기업이 대거 감원을 실시 중이다.
현지에서 만난 IT 종사자들은 한국과 달리 미국의 경우 고용 환경이 유연해 즉각적인 해고가 쉬우며 대규모 해고 역시 과거부터 있어던 일이라고 했다. 구조조정과 인력 감축이 흔한 이곳에서 성과가 좋지 않은 직원을 하루아침에 해고하는 것은 물론 경기가 악화할 때 대규모 감원을 하는 것 역시 익숙한 풍경이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IT업계 관계자는 “미리 해고 여부를 알려주면 직원이 주요 정보를 빼돌릴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보안을 이유로 직원을 갑자기 당일 해고하고 모든 내부 시스템 접근을 차단하는 것도 실리콘밸리에선 흔한 일이다”라며 “오히려 해고와 고용이 자유로워 새로운 직장을 얻기 위해 자신의 해고를 널리 알리고 구직활동을 하는 것도 이곳의 문화다”라고 했다. 이어 “최근 코인베이스 등 기업에서 해고된 사람도 링크드인에 자신이 해고됐다고 바로 글을 공유한다”라며 “그래야 또 새로운 곳에서 ‘오퍼’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다만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현지 상황을 고려해도 현재의 구조조정은 규모가 이례적일 뿐 아니라 IT 업계 채용시장 자체가 얼어붙은 상황이라 이전처럼 유동적인 재취업 역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가 특히 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국인의 근로 비율이 높은 이 지역 특성상 해고는 미국 땅에서의 추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거주자 중 38.2%는 외국 태생이다. 특히 이들 중 70.5%가 컴퓨터 및 수학 직군으로 테크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테크 직업군 종사자 중 학사 학위 이상을 가진 이들의 출신지는 인도(26%), 중국(14%), 유럽(7%), 한국(2%) 등으로 외국 출신이 77%에 달한다.
이들 중 다수는 취업을 통해 기업 지원으로 ‘전문직 취업비자(H-1B)’를 받고 미국에서 최대 6년까지 거주할 수 있는데, 해고 대상자가 되면 비자의 효력도 사라진다. 해고 시점부터 60일 이내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데 실패하면 미국에 함께 온 가족과 함께 자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메타, 리프트, 트위터, 세일즈포스 등 테크 기업이 H-1B 비자를 스폰서한 직원은 최소 4만5000명인 것으로 추산됐다. 주요 기업이 한꺼번에 감축하고 IT 업계 자체에 한파가 분 현재 새 일자리를 전처럼 쉽게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현지의 목소리다.
실리콘밸리 테크기업 종사자는 “특히 지금처럼 대규모 인원 감축을 기업이 진행하면 당분간 기업이 해당 직군에 있어 외국인의 비자를 스폰서하기가 어려워지고 외국인 고용 자체가 축소될 위험이 있다”라며 “미국 현지에 해당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외국인을 뽑아야 한다고 당국을 설득해야 하는데, 해당 직군의 사람을 직접 해고한 상황에서 또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 설득력을 잃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특히 메타의 경우 갓 H1-B 비자를 발급받고 미국에 입국한 직원이 해고 통보를 받는 등 문제가 이어져 직원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메타는 직원 중 약 15%가 H-1B 비자를 소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포브스지에 따르면 메타로부터 해고 통보받은 일부 H-1B 비자 소지자는 지난달 회사 인사팀에 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해고 시점을 늦춰달라고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재들은 빠르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IT 스타트업에 지원하는 등 구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타트업 역시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 자금 부족에 직면했으나 비교적 신속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인재가 몰리고 있는 것이다. 또 빅테크 기업이 감원에 나서자 금융, 자동차 등 다른 산업군으로 눈을 돌리는 IT업계 종사자도 늘고 있다.
현지 스타트업 관계자는 “아직 초기 단계인 회사임에도 최근 구직자 이력서를 받아보고 있는데 메타 등에서 해고된 많은 인재가 지원했다”라며 “구직 시장에 인재가 대규모로 풀린 만큼 이들이 발 빠르게 새 일자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