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급감, 가격 하락의 이중고로 한파를 맞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의 어려움이 비메모리(시스템)반도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분야 수요 역시 메모리처럼 글로벌 인플레이션, 지정학적 위기로 크게 준 데다 재고 수준이 높아지면서 업황 부진이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모바일 칩을 만드는 퀄컴, 미디어텍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는 4분기 실적을 하향 수정하고 있고, 팹리스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 1위 TSMC는 최근 큰 규모의 주문 취소를 당했다. 반도체 전반의 불황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부터 시작된 스마트폰 시장 침체로 모바일 칩을 설계하는 퀄컴, 미디어텍 등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바일 칩(AP)은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메모리, 통신칩 등을 한데 모아 만든 통합칩(SoC)으로 스마트폰의 기능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국 퀄컴과 대만 미디어텍이 시장 1, 2위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플래그십(최상위)용 칩이 주력인 퀄컴은 매출에서, 중저가 칩이 중심인 미디어텍은 출하량에서 각각 1위다.

미디어텍 모바일 칩 디멘시티9000. /미디어텍 제공

퀄컴과 미디어텍은 올해 3분기까지는 탄탄한 성적을 거둬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퀄컴의 3분기 휴대전화(핸드셋) 사업부문 매출은 66억달러(약 9조2600억원)로, 전년 대비 40% 증가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8월 출시한 폴더블(접히는) 스마트폰 갤럭시Z 플립4·폴드4에 모바일 칩 스냅드래곤 8+(플러스) 1세대(젠1)를 독점 공급하면서 호실적을 기록한 것이다. 미디어텍도 3분기 모바일 부문에서 782억대만달러(약 3조4200억원)의 매출을 올려 전년 같은 기간보다 7% 성장했다.

다만 두 회사는 4분기 실적에 대해 모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각각 주력인 모바일 칩 사업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스마트폰 판매 부진이 이어지면서 칩 매출 역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퀄컴은 거시경제 환경으로 야기된 불확실성을 고려, 스마트폰 판매량 감소 전망치를 한 자릿수에서 10%대로 수정했다. 또 5세대 이동통신(5G) 스마트폰 판매량을 7억대에서 6억5000만대로 낮췄다. 퀄컴은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5G 스마트폰이 7억5000만대 판매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면서 4분기 매출을 100억달러(약 14조300억원)로 예상했다. 이는 증권가 예상치인 120억달러(약 16조8300억원)에 한참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비용 감축을 위해 이번 분기부터 채용을 동결하고 특정 제품에 대한 지출 삭감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반도체 생산 시설. /TSMC 제공

미디어텍도 올해 4분기 예상 매출을 1080억~1194억대만달러로 제시했다. 3분기에 비해 20% 이상 줄어든 수준이다. 미디어텍은 현재 롱텀에볼루션(LTE·4G)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있는데, 미국 달러 강세에 따른 개발도상국의 소비력 약화로 판매량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 릭 차이 미디어텍 CEO는 “스마트폰, TV 등 모든 시장이 10년간 본 적이 없는 가장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다”라며 “고객사가 재고 확보에 매우 보수적이다”라고 했다.

시스템반도체의 어려움은 파운드리로도 번지는 중이다.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전환이 매끄럽지 않은 시장 1위 TSMC의 경우 최근 주문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디지타임스 등 대만 언론에 따르면 TSMC에 대한 주문량은 지난 9월부터 감소세에 있다. 1분기까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지난 3분기부터 미디어텍과 엔비디아, AMD 등 핵심 고객사가 물량을 줄이고 있다고 한다.

TSMC가 연말 양산을 예정하고 있는 3㎚ 공정도 예정보다 주문량이 40~50%쯤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수요 둔화에 칩 생산 단가가 높게 책정된 탓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다. TSMC는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웨이퍼(반도체 원판), 소모품, 장비 등의 주문을 취소하고 있으며, 생산능력은 웨이퍼 기준 4만4000장에서 1만장 수준으로 줄였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주문 취소는 그래도 버틸 체력이 있다고 알려진 5㎚ 이하 초미세공정이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수요 절벽에 이른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라며 “반도체 한파가 메모리부터 시작됐지만, 기기 수요 둔화는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업계 전반의 어려움이 당분간 계속될 수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