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반도체 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인텔, TSMC 등이 차세대 극자외선(EUV)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 장비를 전 세계 독점 공급하는 반도체 장비 회사 네덜란드 ASML은 반도체 기업들이 장비를 모두 발주했다고 밝혔다.
21일 ASML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개발 단계에 있는 차세대 노광장비 ‘하이 렌즈수차(NA) EUV’를 주문했다. 이 장비는 기존 EUV 장비에 비해 렌즈 해상력을 높인 제품이다. 해상력은 렌즈가 화면이나 물체를 실제 모습처럼 비칠 수 있는 능력으로, NA라는 수치로 표현한다. 이 수치가 높으면 해상력이 증가하고, 빛 굴절률이 낮아져 초미세회로를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새길 수 있다. 기본 EUV 장비 가격이 약 1억6000만유로(약 2200억원)라면 하이 NA EUV 장비는 3억5000만유로(약 4900억원)를 호가한다. ASML이 2025년 양산을 목표로 개발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인텔, TSMC 등 기존 미세공정에서 경쟁 중인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모두 이 장비를 주문했다는 게 ASML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2025년 2㎚(나노미터·10억분의 1m), 2027년 1.4㎚ 미세공정 반도체 양산 계획을 밝히고 있다. 계획대로 제품 생산이 이뤄지려면 하이 NA EUV 장비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SK하이닉스도 차세대 D램 개발을 위해 이 장비가 필수라고 밝혔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현재 D램은 10㎚급 1a(4세대) 초기 단계에서 양산하고 있는데, 1d(7세대) 수준에서는 핀과 핀 사이의 공간이 너무 가까워져 트랜지스터 동작의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기존의 EUV 노광 장비만으로는 어렵고, 하이 NA EUV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이 NA EUV의 기술 난도가 워낙 높은 탓에 반도체 업계는 이 장비를 먼저 받기 위한 확보전에 돌입했다. 장비를 적기에 받지 못할 경우 미세공정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장비를 빨리 도입할수록 양산 노하우는 더 많이 쌓인다”라며 “반도체는 생산 수율(양품 비율)이 중요한데, 이는 양산 노하우가 쌓여야만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장비를 경쟁사보다 하루라도 더 빨리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경우 미세공정 양산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에 따라 시장 주도권을 쥔다. 양산을 시작하고 생산 안정화가 진행되면 반도체 생산 주문이 몰리기 때문이다. 현재 양산 중인 EUV 장비도 쟁탈전이 치열하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 NA EUV를 선제적으로 가져오기 위한 눈치 싸움도 상당한 것으로 업계는 전한다.
기존 EUV 연간 생산물량은 40대 안팎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늘 수요가 공급을 앞선다. ASML이 슈퍼을(乙)로 불리는 이유다. 그런데 지정학적 이유, 반도체 공급 부족 등으로 장비 생산 일정은 계속 밀리고 있다. 하이 NA EUV가 출시되기 전에 EUV를 추가 도입해 미세공정 제조 능력을 키우고 싶어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직접 네덜란드 ASML 본사를 찾은 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장비를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어서다. 현재 EUV 장비는 TSMC가 수백대, 삼성전자는 수십대, SK하이닉스는 2대를 운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경기 화성시 동탄에 들어설 ASML 제조 센터가 국내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ASML은 2025년까지 2400억원을 투자해 동탄에 장비 유지보수와 부품 국산화를 위한 시설을 설치하고, EUV 장비 엔지니어를 위한 트레이닝센터 등을 조성한다. ASML 관계자는 “한국 업체들이 겪고 있는 부품 공급 부족 문제가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까지 장비를 수리하려면 네덜란드 본사까지 보내야 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 부품 수리가 완료될 수 있도록 해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