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첫 국정감사를 앞두고 이동통신 업계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통신 3사가 최근 ‘5G 중간요금제’ 및 ‘e심(eSIM) 요금제’를 출시했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거나 비슷한 요금제를 선보이면서, 기대했던 요금 경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5G 중간요금제는 24~30GB(기가바이트) 등 소량 데이터 구간에 초점이 맞춰졌고, 가격도 최대 2000원 차이 밖에 나질 않았다. e심 도입과 함께 등장한 듀얼심 요금제의 경우, 통신 3사가 모두 가격을 ‘8800원’으로 출시했다. 사실상 1원 단위까지 똑같아, 소비자단체 등에서는 통신사들이 요금 설계 정보를 사전 공유하거나 담합을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 국감 피한 통신 3사 CEO, 올해는 올까
22일 통신 3사와 국회 등에 따르면, 국회 과방위 소속 의원들은 유영상 SK텔레콤(017670) 대표, 구현모 KT(030200) 대표, 황현식 LG유플러스(032640) 대표 등을 국감 증인 신청 목록에 올렸다.
올해 국감에서는 5G 중간요금제, 듀얼심 요금제 등 요금제 담합 의혹과 통신 3사의 기지국 투자, 28㎓ 활성화 이행, 알뜰폰 활성화 등에 대한 논의가 있을 전망이다. 고물가와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으로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국민의 물가 고통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통신 3사의 상반기 영업이익이 2조5000억원에 달하면서, 통신비 인하를 위한 여력이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번 국감에서 일반 증인 출석 명단에 통신 3사 최고경영자(CEO)가 재차 포함될지도 관심사다. 통신 3사 CEO는 매년 국감이 열릴 때마다 소환 요청을 받는 국감 단골손님으로 꼽힌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국감 증인 채택을 다음 회의로 연기했지만, 지난해 통신 3사 CEO들이 국감에 불참한 만큼, 올해는 출석이 유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한 정부 담당 관계자는 “지난해 국감에선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와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참석하는 등 플랫폼 업계가 화두였고, 통신 3사의 CEO들은 참석하지 않았다”며 “보통 국감 때마다 주요 현안이 달라질 수 있는데, 올해는 통신사가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한 과방위 의원실 관계자는 “통신비 인하는 보수, 진보 정권을 떠나 모두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내놓는 분야다”라며 “특히 올해는 고물가 상황에서도 통신 3사가 역대급 실적을 기록한 만큼, 닮은꼴 요금제와 통신시장의 경쟁 상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은 상황이라, 국감에서 비중 있게 다뤄질 것 같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4월 고물가 대책으로 5G 중간요금제 출시 유도를 공식화했다. 통신 3사는 지난달 24~30GB 구간의 중간요금제를 출시했다. 업체별로 ▲SK텔레콤, 월 5만9000원에 데이터 24GB 제공 ▲KT, 월 6만1000원에 데이터 30GB 제공 ▲LG유플러스, 월 6만1000원에 데이터 31GB 제공 등으로 구성됐다.
문제는 통신 3사가 비슷한 요금제를 출시하면서, 중간요금제에 대한 실효성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애초 5G 중간요금제는 그간 10~100GB 사이에 요금제가 없다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정부나 시민단체는 최대한 사용한 만큼 지불할 수 있도록 3~4구간의 단계별 요금제를 기대했다. 하지만 통신 3사는 5G 평균 데이터 사용량이 27GB라는 점을 내세워, 데이터 소량 구간에만 요금제를 만들었다. 5G 서비스를 선보인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30~100GB 사이의 요금제는 없다. 참여연대는 통신 3사의 중간요금제와 관련해 “중간요금제는 이용자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생색내기식 조치’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한 통신사 대리점 관계자는 “아직 출시 초기라 확정해서 말하긴 어렵지만, 중간요금제를 가입하겠다고 찾는 손님은 매우 적다”라고 했다.
◇ 판박이 5G 중간·e심 요금제, 정부 자극했나
일각에서는 정부가 오는 11월 알뜰폰 활성화 대책을 예고한 것도, 통신 3사의 닮은꼴 5G 중간·e심 요금제가 정부를 자극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통신 3사는 모두 8800원짜리 듀얼심 요금제를 출시했다. 가격이 1원까지 똑같은 셈이다.
과거 통신 3사는 유심 시절에도 담합 의혹을 받았다. 2014년 유심이 도입됐을 당시, 통신 3사는 유심의 가격을 동일하게 9900원으로 책정했다. 이후 가격을 8800원으로 내렸는데, 1100원이라는 할인 금액마저 모두 똑같았다. 국회에 따르면, 통신 3사는 2014년까지는 9900원(1억122만8347개), 2015년부터는 8800원(878만3247개)이라는 동일 가격으로 유심칩을 판매했다.
또 2015년 통신 3사는 ‘데이터 중심요금제’를 출시했다. 2015년 5월 8일 KT가 월 3만2900원에 문자·음성통화 무제한, 데이터 300MB, 월 6만5890원에 문자·음성통화·데이터 무제한 제공을 담은 요금제를 출시했다. 같은 달 14일 LG유플러스, 19일에는 SK텔레콤이 10원 단위까지 동일·유사한 요금제를 연달아 선보였다.
일각에서는 통신 업계의 경쟁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물가는 기재부가 담당하고 있지만, 경쟁 촉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공정위가 나서면서 실마리를 푸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계란과 닭 부족 사태 때도 공정위가 현장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이번 e심 요금제는 통신 3사가 사실상의 담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같다”라며 “통신시장에 있는 3개 회사가 출시하는 요금제가 동일하게 8800원이라는 점을 볼 때 정부가 통신시장의 경쟁 촉진을 위한 정책적인 수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도 “국민들이 물가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최근 통신 3사가 대동소이한 요금제를 출시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며 “통신 시장의 경쟁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