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영국 출장으로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세계 반도체 설계 자산(IP)을 장악하고 있는 ARM이 삼성전자가 공언한 3년 내 의미 있는 인수합병(M&A)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ARM은 전 세계 모바일 칩의 기초 설계 IP를 거의 도맡고 있는 핵심 기술 기업이다. 현재 SK하이닉스, 인텔, 퀄컴 등이 인수를 위한 군침을 흘리고 있다.
2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의 영국 방문의 목적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 참석과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지원을 위한 것이지만, 뒷배경으로 ARM 인수전에 뛰어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ARM은 영국 런던 북쪽 케임브리지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 자산 기업(칩리스)으로, 반도체 생산의 가장 핵심적인 설계 IP를 제공한다. 전 세계 모바일 칩 90% 이상이 ARM IP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버용 프로세서, 자동차, 카메라 등 반도체가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설계 IP를 제공 중이다. 퀄컴과 애플, 삼성전자 또한 ARM IP에 기반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ARM은 지난 2019년 400억달러(약 55조원)에 M&A를 시도했으나, 각국 반독점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산업 영향력이 큰 M&A의 경우 반드시 이해당사국의 반독점 심사를 거쳐야만 기업 결합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ARM의 영향력이 워낙 절대적이다 보니, 특정회사(엔비디아)에 인수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각국 반독점기구들이 우려한 것이다. 결국 엔비디아는 올해 초 ARM 인수를 포기했고, 이 직후 ARM의 기업가치가 100조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각 반도체 업체들은 ARM을 컨소시엄 형태로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밝히고 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3월 "ARM 인수합병을 위해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최고경영자(CEO) 또한 "퀄컴은 ARM 투자에 관심 있는 당사자로 인수를 위해 다른 칩 제조사와 협력할 수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 역시 ARM에 높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스템LSI 사업부가 만드는 다수의 프로세서가 모두 ARM 설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빅테크 기업인 애플 역시 ARM IP를 쓰고 있어 인수가 현실화될 경우 경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업계는 지난 5월 펫 겔싱어 인텔 CEO가 방한해 이 부회장을 만났을 당시, 두 회사의 전방위적인 협력 논의와 함께 ARM 인수를 위한 대화를 나눴을 것으로 보고 있다. 모바일 칩 분야에서 ARM에 밀려 신규 개발 계획을 취소한 인텔은 노트북 칩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ARM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노트북과 모바일 칩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만큼, 인텔 역시 ARM 인수를 통해 사업 확장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최대 100조원, 추정 가치 50조~70조원에 달하는 ARM과 삼성전자가 보유한 125조원의 현금성 자산을 모두 고려하면 삼성전자는 ARM을 단독으로 인수할 여력이 충분하다. 한 회사에 이런 막대한 돈을 투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만 ARM이 가지는 위상을 떠올리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게 업계 설명이다.
다만 독점에 따른 우려 역시 상상 이상으로 큰 상황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도 공동인수로 방향을 잡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경우 공동인수를 노리는 회사들의 이해관계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대부분의 회사가 ARM의 설계를 가져다가 회사에 맞게 변형해 사용하는데, 설계 단계에서부터 경쟁사의 기밀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과의 동침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016년 ARM를 314억달러에 사들인 일본 소프트뱅크는 엔비디아의 ARM 매각 불발 이후, 기업공개(IPO)로 방향을 틀었다. 최근 큰 폭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소프트뱅크가 ARM의 IPO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2022년 회계연도가 끝나는 내년 3월 말까지 ARM을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기술기업의 해외유출을 우려한 영국이 ARM의 영국 런던증시 상장을 소프트뱅크 측에 제안한 점은 변수로 떠오른다. 소프트뱅크는 뉴욕 증시 상장을 최우선순위로 두면서 런던 증시를 살피는 중이다. 설득을 주도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실각으로 논의가 잠정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가 여왕 사망 애도 기간 이후 다시 소프트뱅크 경영진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소프트뱅크가 ARM의 IPO를 추진한다면 각 반도체 기업들은 지분 확보를 위해 경쟁할 가능성이 있다.
김형태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소프트뱅크는 비전펀드 운용 손실 등으로 17조원의 순손실을 기록, 자금 조달이 시급한 상황이어서 IPO의 속행이 예상된다"라며 "퀄컴,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인텔 등이 컨소시엄으로 인수전에 참여할 의지를 보이고 있으나, 성사 가능성은 희박하고,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 주요 반도체 업체들의 지분 확보 경쟁이 전개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