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작업자가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이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내년 투자를 더 늘리고 있다. 수요 위축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고 있지만 미래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를 멈출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업황 반등을 기대하는 선제적 투자라는 분석이 나온다.

12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3분기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전 분기 대비 각각 13~18%, 30~35% 급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4분기에 대해서는 “가격 붕괴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라고 했다. 당분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부진한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가격 하락이 업체 간 치킨(chicken·겁쟁이) 게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치킨 게임은 경쟁자가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가 파국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게임을 말한다. 일반적인 제조업들은 제품 가격이 하락하면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는 방법으로 가격을 방어하지만, 반도체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산업 특성상 생산량을 단기간에 줄일 수 없고 일부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생산량을 늘리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은현

지난 2007년 금융위기로 반도체 수요가 급감하자 대만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공급량을 늘린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존 대비 생산량을 10~20% 늘렸는데, 이로 인해 업체 간 출혈경쟁이 시작됐고 10여개에 달하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파산했다. D램 3강, 낸드플래시 4강 체제가 갖춰진 것도 이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차별화된 기술력과 자금력을 앞세워 업계 1~2위로 올라섰다.

다만 올해 시장 상황은 국내 업체에 불리하다. 반도체 수요 감소와 더불어 미국의 중국 제재로 국내 업체들의 반도체 수출길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반도체 수출의 40%(홍콩 포함 6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그런데 미국의 제재가 강화돼 국내 업체들의 중국 수출량이 줄어들 경우 국내 반도체 매출은 줄어들 수 있다.

여기에 TSMC, 인텔, 마이크론, YMTC 등 경쟁 업체와의 기술 경쟁도 고조되고 있다.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양산 세계 최초 타이틀을 삼

성전자에 뺏긴 TSMC는 차세대 기술인 2㎚ 공정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인텔은 미국 정부 지원에 힘입어 파운드리 사업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다. 마이크론과 YMTC 등 후발 주자는 200단 이상 낸드플래시 개발에 성공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P2 건설 당시 모습. 지난 2020년 8월 본격적인 반도체 양산에 들어갔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내년 투자 계획을 늘리는 방법으로 시장 상황에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투자 계획을 일부 연기하거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선제적인 투자로 다가올 슈퍼사이클(장기 호황)을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업계는 오는 2024년까지 반도체 시장 상황이 현재와 같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2025년부터 반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 3생산라인(P1) 양산을 시작하는 동시에 4생산라인(P4) 건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P4는 오는 2023년 6월 완공이 예상되는데, 이는 P3와 비교해 건설 기간이 10~20% 줄어든 속도다. 동시에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 미래 기술을 개발한다. 경계현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7일 “그동안 삼성전자의 투자 패턴을 보면 호황기에 투자를 좀 더 많이 하고 불황기에 투자를 적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라며 “최근에는 반도체 사이클이 짧아지면서 시장 수요에 의존하는 투자보다는 꾸준한 투자가 더 맞는 방향이 됐다”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청주에 M15X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6월 말 이사회에서 보류한 M17 공장과는 별개의 확장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향후 5년에 걸쳐 M15X 공장 건설과 생산 설비 구축에 15조원을 투자한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6일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위기에 미래를 내다본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에 SK하이닉스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라며 “다가올 10년을 대비해 M15X 착공은 미래 성장 기반을 확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