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견제 의도가 짙은 미국 주도의 반도체(칩)4 동맹 참여를 두고, 윤석열 정부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셈법이 복잡하다. 대(對) 중국 반도체 수출은 전체 60%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핵심 생산시설이 중국에 있는 탓이다. 칩4 동맹 참여로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국내 산업의 큰 축인 반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워싱턴 소식통 등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한국 정부 측에 칩4 동맹을 위한 반도체 공급망 실무회의를 열겠다고 통보한 뒤, 이 회의 참여 여부를 8월 말까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칩4 동맹은 반도체 분야 특장점을 지닌 국가를 모은 글로벌 협력체로, 지난 3월 미국이 제안했다. 반도체 설계에 강점을 지닌 미국, 소재와 장비의 일본, 생산 능력의 한국과 대만이 모이는 식이다. 4개국이 모여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 공급까지 아우르는 전략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현재 일본과 대만은 칩4 동맹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입장이 조금 다르다. 중국은 국내 반도체 업계가 포기할 수 없는 거대시장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대만’이 동맹에 껴있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중국이 한국에 대해 칩4 동맹 참여를 이유로 경제 보복을 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세계 선두권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또한 칩4 동맹을 바라보는 시선이 편하지만은 않다. 미국만큼 중국 사업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 반도체 수출액 중 중국 비중은 39%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채택 중인 홍콩까지 합하면 60%에 달한다.
특히 중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매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에 있어 중요 시장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데, 시안은 삼성전자 전체 낸드 생산의 40%를 차지하는 핵심 시설이다. 글로벌 전체 낸드플래시의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또 쑤저우 공장에서는 반도체 후(後)공정인 패키지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지난 1분기 중국 매출은 14조8607억원에 달한다. 이는 미국(16조6852억원)에 이은 두 번째 규모다.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반도체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35% 내외라는 것을 고려하면 중국 시장 반도체 매출은 지난 1분기 4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서 D램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회사 D램 생산량의 50%를 이 공장에서 책임지며, 전 세계 D램 생산량의 15%에 달한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자회사인 SK하이닉스시스템IC의 공장도 우시에 있다. 또 다롄에서는 낸드 생산라인 증설을 추진 중이다.
이런 상황이 고려돼야 하겠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 측 요구를 거부할 가능성은 대단히 작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미국은 중국 이상으로 중요한 시장인데다, 반도체 원천 기술과 장비 등에서 대(對)미 의존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정부는 명확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중국 측의 심기를 살피고 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4일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나라는 미국과 다양한 제도를 통해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해 오고 있지만, 현재까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고 했다. 외교부는 ‘칩4 동맹’이라는 단어 대신 ‘반도체 관련 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협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경제와 산업은 철저하게 돈의 측면에 움직이기 때문에 그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 반도체 산업이 줄타기를 할 수 있었다”라며 “다만 미국의 칩4 동맹은 정치적인 목적이 크기 때문에 한국 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동맹 참여를 타진하는 그런 그림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