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 부산사업장 입구 모습. /윤진우 기자
전자 제품의 크기는 작아지지만 기능이 늘어나면서 기판은 다층화되는 추세다. 20층 이상 다층 기판을 만드는 데 수개월이 걸릴 만큼 미세공정은 복잡하다.

삼성전기가 지난 14일 부산사업장 반도체 패키지 기판 생산라인을 공개했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반도체와 메인 기판 간 전기적 신호를 전달하는 부품이다. 또 반도체를 외부의 충격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반도체 칩을 두뇌에 비유한다면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뇌를 보호하는 뼈와 뇌에서 전달하는 정보를 각 기관에 연결하는 신경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 칩은 메인 기판과 서로 연결돼야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메인 기판의 회로(전기 신호가 흐르는 길)는 반도체만큼 미세하게 만들기 힘들다. 반도체 칩의 단자 사이 간격은 A4 용지 두께 수준인 100㎛(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인 반면 메인 기판의 간격은 350㎛로 3배가 넘는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반도체 칩과 메인 기판 사이의 다리 역할도 담당한다. 이런 작업을 업계는 단자 간격을 맞추는 재배선(RDL)이라고 한다.

삼성전기는 반도체 패키지 기판 가운데 첨단 제품으로 꼽히는 플립칩(FC)-볼그리드어레이(BGA) 생산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2조원을 투자해 FC-BGA 시설을 늘리고 있다. FC-BGA가 반도체, 디스플레이에 이어 국내 부품업계의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은현

삼성전기가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만든 건 지난 1991년부터다. 2002년에는 FC-BGA를 처음으로 양산했다. 또 이듬해에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130㎛ 두께의 FC-BGA를 개발하기도 했다. 삼성전기는 30년 반도체 패키지 양산 경험을 앞세워 플래그십(최상위 제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용 FC-CSP에서 세계 1위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삼성전기는 세종시 연동면에 있는 세종사업장과 부산시 강서구에 있는 부산사업장에서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만들고 있다. 세종사업장에서는 모바일용 FC-CSP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FC-CSP는 칩과 기판의 크기가 비슷해 공간 효율이 중요한 모바일용 AP 패키징에 주로 활용된다.

부산사업장의 경우 고성능 PC, 서버, 전장, 네트워크 등에 사용하는 FC-BGA를 주로 만들고 있다. 또 차세대 FC-BGA 연구개발(R&D)도 부산사업장에서 진행한다. FC-BGA 핵심기지 역할을 부산사업장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말 베트남 북부 타이응웬성 옌빈산업단지 생산공장에 FC-BGA 생산시설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투자 규모는 9억2000만달러(약 1조1000억원)로, 베트남공장은 2023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첨단 반도체 기판인 FC-BGA. /삼성전기 제공

FC-BGA 생산 과정은 반도체를 만드는 공정과 유사하다. 반도체 기판 원재료인 동박적층판(CCL)에 노광기로 회로 이미지를 새기고, 불필요한 부분은 녹여 제거하는 공정이 반복된다. 또 각 층의 기판에 구멍을 뚫고, 뚫린 구멍과 회로에 도금하는 과정도 거친다.

반도체 공정과 차이가 있다면 기판의 강성을 유지(코어)하는 동박적층판의 양면에 기판을 쌓아간다는 것이다.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한 방향으로만 쌓는 반도체와 달리 반도체 패키징 기판은 위와 아래로 동시에 기판을 쌓아간다. 이는 한정된 기판에 최대한 많은 회로를 새기기 위한 공법이다. 양면에 대칭 구조로 기판을 쌓아가기 때문에 기판 층수는 4층, 6층, 10층, 20층 등 짝수로 구성된다. 삼성전기는 현재 서버용 FC-BGA에 20층 이상 다층 기판을 적용하고 있다.

다층 기판을 사용할 경우 많은 회로를 새길 수 있지만, 각 층에 있는 회로를 서로 연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위해 기판에 미세한 구멍(비아·Via)을 뚫고 도금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연결하는데 구멍의 크기가 작을수록 전력 손실이 없어 좋다. 기판에 뚫는 구멍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A4용지 두께의 절반인 50㎛ 수준인데, 삼성전기는 A4용지 두께 10분의 1 수준인 10㎛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삼성전기가 이날 공개한 반도체 패키지 기판 생산 과정은 기판에 구멍을 뚫고 도금하는 과정, 불필요한 부분을 부식시켜 깎아내는 식각(蝕刻) 공정 등이다. 대부분의 공정이 장비 내부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제품을 옮길 때를 제외하면 사람이 관여할 필요가 없다.

삼성전기 부산사업장 관계자가 반도체 패키지 기판 제작 공법을 설명하는 모습. /삼성전기 제공

눈에 띄는 점은 티끌 한 점 용납하지 않는 청정한 작업 환경이다. 모든 출입자는 방진복과 방진모, 실내화를 신고 30초 에어샤워를 통과해야 한다. 또 외부 물질 유입을 막기 위해 선크림, 틴트, 속눈썹, 마스카라, 흑채 사용도 금지한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A4용지 두께보다 얇은 물질과 공정을 사용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관리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다층화되는 추세다. 전자 제품의 크기는 작아지는 반면 기능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버와 네트워크용 FC-BGA 기판 층수는 20~40층에 이른다. 그만큼 생산 기간은 오래 걸리고, 수율(전체 생산품에서 양품 비율)이 낮아 가격도 비싸다.

삼성전기는 국내 최초로 서버용 FC-BGA 양산을 올해 하반기에 시작한다. 서버용 FC-BGA는 반도체 패키지 기판 가운데 기술 난도가 가장 높은 제품이다. 미세회로 구현, 대면적화, 층수 확대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 장벽이 높지만 수요는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와 욜디벨롭먼트(Yole)에 따르면 2026년까지 전체 패키지 기판 매출이 연평균 10% 성장할 동안 서버용 FC-BGA는 23% 넘는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기가 FC-BGA 생산시설 투자를 진행한 부산 사업장 모습. /삼성전기 제공

삼성전기는 서버용 FC-BGA 시장 공략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기판에 여러 개의 수동 부품과 반도체를 한 번에 패키징 할 수 있는 EPS(Embedded Passive Substrate) 등 차별화된 SiP(System in Package)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기는 기판 위에 모든 시스템을 통합하는 신개념 패키징 기술 SoS(System on Substrate) 시대를 열겠다는 전략이다. SoS는 여러 반도체를 하나의 칩으로 구현하는 시스템온칩(SoC·System on Chip)을 변형시킨 용어다.

삼성전기는 기판의 두께를 더 얇게 만들고, 신호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코어리스(Coreless) 공법도 확대 적용하고 있다. 코어리스는 기판의 강성을 유지하는 동박적층판 대신 ABF(일본 아지노모토가 만든 필름), PPG(Pre Preg)를 사용하는 기술이다. 삼성전기는 코어리스 공법 중에도 한 단계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 ABF 공법을 2년 전부터 양산하고 있다.

황치원 삼성전기 패키지개발팀 팀장은 “FC-BGA 시장은 2027년까지 공급 부족이 예상되며, 이 가운데 서버용 FC-BGA는 20% 고성장이 기대된다”라며 “비대칭 등 차별화된 EPS, 코어리스 공법 등 차세대 기술을 앞세워 서버용 FC-BGA 시장을 공략하겠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