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가 반도체 업계를 덮치고 있다. 반도체 원재료 가격이 일제히 오르면서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위기가 더욱 심화되는 모양새다. 반도체 가격이 더 오를 경우 스마트폰이나 PC 등 정보기술(IT) 기기 가격도 치솟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11일 전자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원재료를 생산하는 기업들은 최근 공급 가격을 인상하는 추세다.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원판) 분야 세계 2위 일본 섬코가 고객사 납품 가격을 올릴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1위 신에츠 역시 설비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공급가 인상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 회사는 지난해에도 공급 가격을 올렸다.
반도체 회로 제작과 표면을 세척하는 가스를 만드는 쇼와덴코 역시 가스 공급가를 지난 1월부터 20% 올렸다. 가스 원재료 가격 인상과 운송비 등의 증가분을 반영한 탓이다.
반도체 노광공정에 사용되는 엑시머 레이저 가스의 원재료인 네온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다. 가격은 지난해 평균 1㎏당 58.77달러에서 지난 3월 292달러로 5배 수준으로 뛰었다. 국내 네온 수입의 23%를 우크라이나가 책임지고 있다. 수입 비중의 66.6%를 차지하는 중국산 역시 지난 3월 평균가격이 1㎏당 569달러로 크게 올랐다.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 원료들의 가격이 줄줄이 오르면서 반도체 제조사 또한 최종 납품 가격 인상을 고려하는 중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대만 TSMC는 내년 1월 공급 가격을 6%가량 올릴 수 있다고 고객사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도 TSMC는 수요 포화로 공급가를 10~20% 인상했는데, 이번에는 원재료 가격 폭등과 인플레이션이 가격 인상의 주된 요인으로 보인다.
또 다른 대만 파운드리 UMC도 22·28㎚(나노미터·10억분의 1m) 수요 증가로 2023년 공급가를 약 6% 인상하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는 대만 언론 보도가 있었다. 삼성전자 역시 파운드리 납품가를 올리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본다.
파운드리 가격 인상은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모든 IT 기기와 가전, 자동차 생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난해의 경우 칩 부족으로 자동차 평균 가격이 15% 상승하기도 했다. 동력계와 조명, 센서, 인포테인먼트 등에서 사용되는 반도체 가격이 오르다 보니, 최종 완제품도 가격 인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반기 출시가 예정돼 있는 애플과 삼성전자의 최신 스마트폰도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먼저 애플은 아이폰14(가칭) 일부 제품의 가격을 이전보다 10만원 이상 올릴 것으로 보인다. 고급형인 프로 모델의 경우 디스플레이에서 노치가 사라지고, 펀치홀 등을 채택, 가격 인상 요인이 충분해 보인다.
삼성전자 또한 하반기 폴더블(접었다 펴는)폰 갤럭시Z폴드4와 플립4의 출시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원재료 부담으로 출고가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폴더블폰 시장 저변 넓히기에 나선 삼성전자가 신제품 가격을 올리면 소비자 저항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가격 인상뿐 아니라 다른 소재, 물류비 등이 올라 수익성에 빨간불이 들어온 가전 가격은 이미 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TV 평균가격은 전년 대비 32% 올랐고, LG전자의 냉장고와 세탁기 평균 판매가는 7.2%, 에어컨은 9.8% 높아졌다. TV 판매가는 26.4% 올랐다. 원자재와 운송비가 오르는 상황에서 수익성 확보를 위해 고급화 전략을 펼친 결과로 두 회사는 해석하지만, 소비자 부담이 그만큼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업계 관계자는 “(원재료의 경우) 장기 계약으로 반도체 등 원재료 수급을 해왔기 때문에 공급가가 변동이 있더라도 실제 완제품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지만, 계약을 새로 맺어야 하는 시점에서의 잇따른 가격 인상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라며 “지금과 같은 원재료, 웨이퍼, 반도체 가격의 동반 상승은 소비자 가격을 끌어올리는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