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D램 등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회로 폭 0.1㎚(나노미터·10억분의 1m)를 줄이기 위한 미세공정 경쟁이 치열하다. 생산성과 원가경쟁력이 중요한 메모리 분야에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 만큼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개월 만에 네덜란드로 날아가 EUV 장비 생산업체인 ASML 경영진을 만난 배경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물론이고, 메모리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해 이 장비를 확보하겠다는 이 부회장의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네덜란드 아인트호번 ASML 본사를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피터 베닝크 ASML CEO(왼쪽) 등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16일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 1분기 5%에 불과하던 SK하이닉스의 4세대(1a) D램 생산 비중이 빠르게 증가해 2분기 10%, 3분기 14%, 4분기 18%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4세대 D램 비중은 1분기 2%에서 2분기 3%, 3분기 6%, 4분기 7%로 예상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4세대 D램 생산 비중이 삼성전자의 2배 이상이 되는 것이다.

D램 분야에서 4세대 제품 수요는 아직 높지 않은 편이다. 다만 4세대 D램은 이전 세대에 비해 양산 기술 난도가 월등히 높기 때문에 생산 비중이 확대된다는 건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기술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미세공정이 적용된 첨단 D램에 있어서 만큼은 업계 2위인 SK하이닉스가 1위 삼성전자보다 우월하다는 뉘앙스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삼성전자의 생산 비중 확대가 더딘 건, 기술력이 낮기 때문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같은 4세대 D램이라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회로 선폭에 있어 차이가 있어 삼성전자의 양산 난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4세대 D램의 선폭을 14㎚로 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14.5㎚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14㎚급 D램을 세계 최초로 양산했다는 업계 3위 미국 마이크론의 회로 선폭은 14.7㎚에 불과해 업계는 마이크론의 ‘세계 최초’ 선언에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D램 제조사들이 미세공정에 집중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력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생산성과 원가 경쟁력에 미세공정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회로 선폭이 좁으면 웨이퍼(반도체 원판)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숫자가 많아진다. 업계는 회로 선폭이 15㎚대에서 14㎚대로 세밀해지면 12인치(300㎜) 웨이퍼 한 장에서 얻을 수 있는 D램 수량이 25% 정도 증가한다고 본다.

현존 세계 최고 성능 D램으로 알려진 SK하이닉스의 HBM3. /SK하이닉스 제공

생산성이 높아지면 원가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현재 D램 시장 선두 업체들의 기술 격차는 과거에 비해 꽤 줄어들었지만, 유독 점유율은 변하지 않고 있다. 이는 고객사들이 계속 거래하던 공급사를 유지하려는 습성 때문이다. 견고한 기존의 공급망 구도를 깨려면 결국에는 더 싼 가격에 양질의 메모리를 공급하는 방법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성능도 좋고, 가격도 싼 업체가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라며 “삼성전자가 메모리 분야 초격차를 이어갈 수 있는 비결은 가장 좋은 성능의 반도체를 만들면서 공급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미세공정이 적용된 반도체는 기존에 비해 전력소모가 수십%씩 낮다. 한 기판 위에 여러 반도체를 얹는 통합칩(SoC) 구성에 있어 전력소모가 낮다는 말은 다른 반도체의 성능을 높여줄 수 있다는 얘기와 같다. 또 기기 전체의 전력소모도 줄이기 때문에 여러 이점이 생긴다.

D램 제조사들은 14㎚급 4세대를 넘어 13㎚급 5세대(1b) D램 개발에도 착수했다. 삼성전자는 앞서 4세대 D램에서 확립한 기술을 5세대에도 사용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5세대부터 기존의 공정에 변화를 준다. 이 과정에서 여러 시행착오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 마이크론의 경우 5세대까지 EUV를 사용하지 않는 기존 공정을 유지하고, 11㎚ 이하 6세대(1c)부터 EUV를 쓴다는 계획이다. 현재 EUV 장비가 구하기 쉽지 않아 고육지책으로 적용 시기를 늦췄다는 게 중론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두번째)이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CEO, 마틴 반 덴 브링크 CTO 등과 함께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결국 D램 시장에서도 EUV 장비는 파운드리 못지않게 필수적인 장비가 됐다. 이를 위한 장비 쟁탈전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계현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 부회장은 지난 14일(현지 시각) 네덜란드 아인트호번 ASML 본사를 찾아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 마틴 반 덴 브링크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만나 차세대 반도체 생산을 위한 EUV 노광장비의 원활한 수급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 부회장이 ASML 본사를 찾은 건 2020년 10월 이후 20개월 만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네덜란드 방문은) ASML과의 기술 협력 강화 등을 통해 EUV를 비롯한 차세대 반도체 생산 기술을 고도화해 파운드리 분야 경쟁력뿐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초격차도 더욱 확대해 나가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