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난으로 칩 완성에 필수적인 기판 수급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기판으로 꼽히는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는 넘치는 수요로 증설 등 투자가 이어지고 있으나, 이미 내년 발주 물량까지 예약이 꽉 차는 등 공급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그간 한국 기업은 이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했지만, 최근 수조원의 투자를 결정하며 경쟁에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다.

27일 시장조사업체 프리스마크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기판 시장은 122억달러(약 15조2250억원)로, 이 중 FC-BGA는 57억달러(약 7조1135억원)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년 대비 39% 성장한 것으로 올해의 경우 지난해보다 25% 시장 규모가 커질 것으로 프리스마크는 전망했다. 또 앞으로 5년간 성장 전망치는 연평균 11%다. 앞선 10년(2011~2020년)의 평균 성장률 1.2%였다.

FC-BGA는 여러 반도체를 얹는 작은 판이다.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한 판에 올리고 각 반도체를 전기회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5세대 이동통신(5G), 인공지능(AI), 고성능컴퓨팅(HPC) 분야 발달로 대량의 정보 처리가 필수인 통합칩(SoC) 구성을 위해선 FC-BGA가 필수다. 미세 회로를 통해 전기 신호를 빠르게 전달하면서도 신호 전달에 따른 손실은 적다는 특성을 갖고 있어서다.

삼성전기가 만든 휘어지는 초박형 FC-BGA 모습. /삼성전기 제공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나타난 비대면 흐름으로, 늘어난 정보기술(IT) 데이터를 소화하기 위한 데이터센터 서버용 칩 수요가 늘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설계회사(팹리스)는 칩 생산량을 늘렸지만, FC-BGA가 수요를 뒷받침해주지 못해 품귀가 나타났다. 여기에 애플, 구글, 아마존과 같은 소위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칩 개발에 나서면서 FC-BGA 수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반도체 기판 업계는 이미 올해 주문은 끝났고, 내년 물량도 예약이 완료되기 직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1년 이상 이어진 반도체 수급난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워낙 기판이 없다 보니 칩 주문을 한 업체들이 직접 기판을 구하러 다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인텔이나 AMD의 경우에는 기존 기판 거래처에 자금 지원을 약속하면서까지 시설 투자를 요청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FC-BGA 시장은 일본 이비덴과 신코,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이 주도하고 있다. 그간 한국은 이 분야 경쟁력이 약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삼성전기와 LG이노텍 등을 중심으로 수조원의 투자가 이뤄지면서 시장 지각변동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베트남 생산기지에 1조3000억원의 FC-BGA 관련 투자를 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최근 부산에도 3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FC-BGA 관련 투자만 1조6000억원에 달하는 것이다. 5G 모바일 칩용 FC-BGA는 물론, 수익성이 높은 서버용 시장도 노린다.

삼성전기가 공격적인 FC-BGA 시장 투자를 한 배경에는 애플 공급망 진입이 있다. 애플은 노트북 등에 사용하는 M1 칩에 이어 차세대 M2 칩의 기판으로 삼성전기를 선택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전기는 이미 PC용 FC-BGA 시장 1위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 애플 M2 칩을 얹은 새 PC 제품은 올해 하반기 출시가 전망된다.

그래픽=이은현

LG이노텍도 지난 2월 4130억원을 FC-BGA 시설투자에 쓴다고 밝히면서 본격적인 시장 진입을 알렸다. 첫 FC-BGA 생산라인은 경북 구미에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해 12월 LG이노텍은 관련 임원급 조직을 만들고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LG이노텍은 FC-BGA와 공정 유사성이 높은 시스템패키지(SiP) 기판, 안테나패키지(AiP) 기판 등에서 시장 1위 사업자다. 그만큼 FC-BGA 시장에서도 빠른 성장이 기대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다만 공격적인 투자에도 FC-BGA 수급난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투자에서 양산까지 적어도 2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좋지만 공급에 숨통을 단기간 틔워주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라며 “당분간 첨단 반도체 공급 상황이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