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코리아에서 정밀 웨이퍼 이송장치를 시연하는 모습. /연합뉴스

반도체 장비 부족 현상이 계속되면서 반도체 제조사들이 중고 반도체 장비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중고 반도체 장비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이마저도 구하기 쉽지 않아 반도체 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25일 전자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회로를 그려 넣는 노광(露光) 장비의 중고 가격은 지난 2020년보다 5배 가까이 올랐다. 하지만 재고가 없어 판매하지 못하고 있다. 웨이퍼를 부식시켜 깎아내는 식각(蝕刻) 장비의 중고 거래 가격은 2배 넘게 뛰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최근 “반도체 첨단 장비 리드타임(장비 업체가 제품을 생산해 배송하는 데까지 걸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산 현장에 투입할 임시 중고 장비를 찾는 반도체 제조사가 늘어나고 있다”라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난이 장기화하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라고 했다.

TSMC에서 생산하고 있는 8인치 웨이퍼. /TSMC 제공

반도체 중고 장비를 찾는 제조사들이 늘어나면서 중고 장비 리드타임도 기존 1개월에서 3개월 이상으로 늘어난 상태다. 특히 삼성전자와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이 임대해 사용하던 중고 장비의 경우 생산라인에 즉각 투입할 수 있어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고 반도체 장비 가운데서도 8인치(200㎜) 반도체 웨이퍼용 장비가 가장 많이 유통되고 있다는 게 닛케이의 설명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에 적합한 12인치(300㎜)와 달리 8인치는 다품종소량생산에 유리하고 값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자동차용 반도체, 전력반도체(PMIC), 디스플레이 구동용칩(DDI), 상보성금속산화반도체 이미지센서(CIS) 등 반도체 공급난을 겪는 제품들이 8인치로 제작된다. 아날로그 반도체의 수요가 계속되면서 8인치 웨이퍼용 중고 장비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중고 반도체 장비 대부분은 중국 업체들이 쓸어가고 있다. 미국 정부의 제재로 미세 공정에 필요한 장비 구입이 불가능해지자 중국은 지난해 말부터 숙련 공정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8인치용 중고 반도체 장비를 확보해 3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상 숙련 공정에 사용하고 있다.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직원이 3D 낸드플래시를 검사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부족 현상이 계속되면서 중고 반도체 장비를 찾는 수요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만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지타임스는 “중고 반도체 장비가 없어서 못 팔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다”라며 “SMIC 등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중고 반도체 장비를 공격적으로 사들이면서 이런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했다.

반도체 장비 확보가 반도체 패권 경쟁의 중요한 승부처로 자리 잡으면서 정부 차원의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자본과 기술력이 있어도 반도체 장비를 확보하지 못하면 사업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라며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장비 매출이 역대 최고 규모인 1026억달러(약 125조5413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712억달러(약 87조1203억원) 대비 44% 증가한 규모다. 중국이 296억달러(약 36조2185억원)어치의 장비를 사들이면서 2년 연속 반도체 장비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지역이 됐다. 한국은 250억달러(약 30조6200억원)로 뒤를 이었다. 웨이퍼 가공 장비 매출이 1년 새 44%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