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학 렌즈를 통해 보여지는 실리콘 웨이퍼(둥근 원판). /ASML

생산라인을 확충하기 위한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의 유례 없는 투자 경쟁이 이어지면서 반도체 장비를 확보하기 위한 업체 간 눈치 싸움이 고조되고 있다. 반도체 핵심 장비를 얼마나 빨리 확보할 수 있느냐가 사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승부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11일 전자 업계 및 외신 등에 따르면 지난달 인텔이 오는 2032년까지 800억유로(약 110조원)를 투입, 유럽에 반도체 생산거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반도체 핵심 장비의 리드타임(장비 업체가 제품을 생산해 배송하는 데까지 걸리는 기간)이 기존 최대 18개월에서 30개월로 늘었다. 인텔은 지난 1월 미국 오하이오에 10년간 1000억달러(122조원)를 투자해 생산라인을 건설하겠다고 밝힌 후 두 달여 만에 추가 투자를 발표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지난 7일 “반도체 칩 제조에 사용하는 핵심 장비의 리드타임이 지난해 최대 12~18개월에서 최대 30개월로 늘어났다”라며 “전례 없는 부품 부족 현상이 장비 산업을 넘어 전체 반도체 업계를 강타했다”라고 했다. 이어 “삼성전자와 TSMC 등이 장비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위 경영진을 해외로 파견하고 있다”라며 “이런 노력에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래픽=이은현

삼성전자와 TSMC는 반도체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와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170조원을 투자, 생산시설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TSMC 역시 올해에만 50조원 이상을 투자해 미국과 일본, 대만에 첨단 파운드리 생산시설을 추가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텔이 미국 정부의 반도체 자국 우선주의에 힘입어 생산 경쟁에 뛰어들면서 반도체 장비를 확보하기 위한 업체 간 경쟁이 고조되고 있다.

반도체 장비 경쟁은 전체 장비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ASML, TEL, 램리서치, KLA 등 5개 업체로 쏠리면서 장비 주문량은 폭증한 상태다. 이 업체들은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회로를 그려 넣는 노광(露光), 그려진 반도체 회로만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을 부식시켜 깎아내는 식각(蝕刻),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막을 씌우는 증착(蒸着) 등 전(前)공정 장비를 주로 만들고 있는 곳이다.

반도체 생산은 웨이퍼에 회로를 새겨 만드는 전공정과 완성된 칩을 쌓고 묶는 후(後)공정으로 나뉜다. 후공정에 해당하는 패키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전공정에 사용되는 장비들이 반도체 생산의 핵심 장비로 꼽힌다. 대만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지타임스는 “리드타임이 길어지는 장비 대부분은 전공정에 사용하는 것들이다”라며 “자본력과 기술력이 있어도 장비 조달 능력이 떨어지면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지는 상황이 됐다”라고 했다.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모습. /연합뉴스(로이터)

반도체 장비 경쟁이 고조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장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진만 삼성전자 부사장은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공급망 문제 탓에 반도체 공장으로 들어오는 장비 반입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라고 했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도 실적 발표에서 “올해도 장비 리드타임이 길어지고 있다”라며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두 업체가 반도체 장비 관련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건 사실상 처음이다.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부품 부족 현상이 계속되면서 당분간 반도체 생산량을 급격하게 늘리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전문가들은 당장 핵심 장비 확보에 집중하는 동시에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한 장비 국산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삼성전자와 인텔, TSMC가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펼치고 있지만, 장비 부품 수급난이 고조되면서 장비 리드타임은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다”라며 “장비 부품 현상을 해결할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과 장비 국산화 움직임이 계속돼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