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중반 이후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두자)’를 표방해왔던 삼성전자가 다시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추격자)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퍼스트무버’의 신화를 쓴 스마트폰 갤럭시에 크고 작은 제품 관련 구설이 끊이지 않아서다. 삼성전자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결국 애플의 전략이었다. 애플처럼 갤럭시 전용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개발해 생태계를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8일 전자 업계에 따르면 노태문 삼성전자 MX(모바일경험)사업부장 사장은 지난달 직원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커스터마이징된 (갤럭시) AP 개발을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이날 노 사장의 발언은 최근 갤럭시S22의 게임 최적화 서비스(GOS) 논란에 대해 한 직원이 해결 방안을 물은 데 따른 것이다.
GOS는 고성능 게임 등을 구동할 때 발생하는 열이나 전력 소모를 막기 위해 스마트폰의 성능을 임의로 낮추는 기능을 뜻한다. 소비자 의사와 상관없이 이 기능을 작동하도록 한 것이다. 소비자는 GOS로 고가의 스마트폰을 구입하고도 발열 문제로 저성능 기기를 써야 하는 모순이 나타났다.
GOS 사태의 원인으로는 AP가 꼽힌다. AP는 모바일 기기에서 여러 정보를 처리하는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하는 통합 반도체다.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통신칩 등이 하나로 모여 있다. 갤럭시S22의 경우 장착된 AP에서 과도하게 열이 발생했고, 이를 막기 위해 GOS가 도입됐다. 이 논란이 너무 크다 보니 노 사장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용 AP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특정 모바일 기기만을 위한 AP 설계와 생산은 원래 애플의 전략이다. 애플은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비롯해 태블릿PC인 아이패드, 애플 워치, 노트북 등 모바일 기기부터 데스크톱 PC까지 모두 자체 설계한 AP를 사용한다. 이를 가리켜 ‘애플 실리콘’이라고 부른다. 반도체의 주요 원료가 실리콘(규소)인 데 따른 것이다.
애플은 과거 삼성전자나 인텔 등에 AP 설계를 맡겨왔다. 그러다가 2011년 아이폰4S부터 본격적으로 자체 AP를 적용했다. 전작인 아이폰4도 애플 실리콘 AP를 썼지만, 당시 삼성전자의 설계를 기반으로 해 진정한 애플의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애플이 모바일 기기의 핵심인 AP를 직접 설계한 효과는 컸다. 먼저 제품 간 운영체제(OS), 소프트웨어의 호환이 매끄러워졌다. 기기 성능도 AP 덕분에 높은 최적화가 이뤄져 소비자 호응이 높아졌다. 현재 애플이 경쟁 회사를 앞서는 것으로 평가받는 ‘생태계 구성’은 애플 실리콘에 의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현재 삼성전자 갤럭시는 다수의 칩 제조사에서 AP를 받고 있다. 또 갤럭시에 사용된 AP가 또 다른 모바일 기기에도 사용된다. 삼성전자 LSI사업부가 개발한 엑시노스도 이 중 하나다. 문제는 이 AP에 범용성이 강조된 나머지 기기별 최적화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GOS 논란도 이런 부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스마트폰 갤럭시를 매개로 한 생태계 구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기존 CE(생활가전), IM(IT&모바일)부문을 DX(디바이스경험)부문으로 통합한 것도 갤럭시 생태계 구성을 위해서다. 삼성전자가 판매하는 모든 기기를 하나의 생태계로 묶어 소비자 생활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전략이다.
그 중심에 ‘갤럭시’가 있는데 잇따른 성능 구설수로 생태계 구성이 원활치 않다. 제품 전략이 시작부터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삼성전자는 갤럭시 전용 AP 개발을 통해 브랜드 신뢰도를 높이고, 완벽한 생태계 구성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지난 10여년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전략을 ‘생태계 구성’에 맞췄고, 그 화룡점정을 찍은 건 이들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전용 AP의 설계였다”라며 “삼성전자의 갤럭시 전용 AP 개발 선언은 좋은 선례를 만든 애플의 움직임을 따라가려는 ‘패스트 팔로워’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