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게임업계의 대형 인수합병(M&A)이 연초부터 연달아 터지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콘솔 시장 우위는 물론, 최근 게임업계의 화두인 클라우드 게임 시장,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게임의 미래로 불리는 메타버스를 선점하기 위한 몸집 불리기로 해석된다. 국내 게임업계 역시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M&A로 분주하다.
일본 정보통신(IT) 기업 소니의 게임 사업 부문인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는 지난달 31일 미국 게임 개발사 번지를 36억달러(약 4조34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번지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콘솔 게임기 엑스박스를 대표하는 ‘헤일로’를 만든 회사로, 업계는 소니의 번지 인수를 두고 MS를 견제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지난달 18일 MS는 게임회사 액티비전블리자드를 업계 M&A 최고액인 687억달러(약 82조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액티비전블리자드는 미국의 국민게임이자 소니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의 대표 타이틀인 ‘콜오브듀티’를 제작한 회사다. 우리에게는 2000년대 초반 PC방 보급과 e스포츠 중흥기를 이끈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워크래프트’를 만든 회사로도 유명하다.
MS의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에 대해 업계는 애초 MS가 지난 2020년 9월 사들였던 미국 게임사 베데스다와 비슷한 취지로 봤다. 베데스다는 유명 판타지 역할수행게임(RPG) ‘엘더스크롤’과 1인칭 총쏘기게임(FPS) ‘풀아웃’의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회사로, 두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발매됐으나 앞으로 신작은 모두 엑스박스로만 출시하기로 했다.
콜오브듀티라는 게임의 상징성을 고려해 MS는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 발표 직후 소니와의 기존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필 스펜서 MS 엑스박스 게이밍 사업부 사장은 “앞으로도 콜오브듀티를 플레이스테이션에서도 유지하고, 기존 액티비전이 소니와 맺은 계약을 이행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소니와 액티비전블리자드의 계약은 오는 2023년까지여서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출시를 장담할 수 없다. MS의 인수 소식이 전해진 날 소니 주가는 하루 동안 12% 넘게 하락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니가 ‘헤일로 시리즈’의 번지를 인수, 소니와 MS는 각각 대표 게임을 인질로 잡게 된 모양새다. 소니 역시 번지가 보유한 게임을 모두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흡수하지 않고, 게임 개발과 서비스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자회사로 두겠다고 전했다. 번지 인수 발표 후 소니 주가는 3.7% 상승했다.
소니와 MS의 행보는 클라우드 게임 시장을 위한 포석으로도 해석된다. 클라우드 게이밍은 게임을 내려받거나, CD·팩을 사지 않아도 개인 기기에서 게임을 스트리밍해 즐길 수 있는 개념이다. 게임을 위한 고성능 PC나 고가의 콘솔이 필요 없기 때문에 게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불린다.
MS는 이미 2017년 6월부터 ‘엑스박스 게임 패스’라는 구독형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국내 기준으로 월 7900원에 목록에 포함된 게임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 지난해에는 콘솔인 엑스박스로도 게임 패스가 확대됐다. 현재 이용자 숫자는 2500만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000만명 가까이 늘었다.
소니는 별도의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를 두고 있지는 않지만, ‘플레이스테이션 나우’라는 클라우드 게이밍의 원조격인 서비스를 지난 2012년부터 북미와 일본, 유럽에서 운영 중이다. 또 콘솔 게임을 지원하는 플레이스테이션 플러스를 운영하고 있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나우와 플레이스테이션 플러스를 합친 ‘스파르타쿠스(코드명)’라는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를 올해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현재 4700만명에 달하는 플레이스테이션 플러스 이용자를 그대로 흡수할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드 게이밍의 성장은 가파를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조사업체 뉴주는 2020년 5억8000만달러(약 7000억원)였던 클라우드 게이밍 시장이 내년 48억달러(약 5조80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MS와 소니뿐 아니라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페이스북 등이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를 시작했거나 개발 중에 있다. 국내 게임사 중에서는 컴투스가 대표 게임 ‘서머너즈워: 천공의 아레나’를 페이스북 게이밍으로 선보인다.
클라우드 게이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력적인 게임의 확보다. 따라서 대형 게임 IP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게임사의 가치는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게임 ‘GTA’와 ‘문명’으로 유명한 미국 게임사 테이크투 인터랙티브 역시 지난달 페이스북 게이밍에서 큰 인기를 끈 ‘팜빌’ 개발사 징가를 127억달러(약 15조3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연초부터 글로벌 게임 업계가 M&A에 100조원 이상을 쏟아부은 이유는 M&A가 기업 규모를 키우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매출 기준 세계 1위 게임 회사인 중국 텐센트 역시 이런 전략으로 회사를 키웠는데, ‘리그오브레전드’의 라이엇게임즈, ‘브롤스타즈’의 슈퍼셀이 모두 텐센트의 일원이다. 텐센트는 게임 ‘포트나이트’를 만든 미국 에픽게임즈, ‘라이프이즈스트레인지’를 개발한 프랑스 돈노드엔터테인먼트의 지분을 각각 40%, 22%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배틀그라운드’를 개발한 국내 게임사 크래프톤의 지분 역시 16% 갖고 있다.
게임업계의 M&A 경쟁은 게임의 미래로 여겨지는 ‘메타버스’ 공략을 위한 교두보로도 해석된다. 사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는 “게임은 가장 역동적이면서 흥미로운 플랫폼일 뿐 아니라 메타버스 플랫폼 개발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나델라 CEO는 지난해 6월 “많은 게임이 메타버스 사회와 경제로 진화해 가는 모습이 자랑스럽다”라고 했고, 또 11월에는 “엑스박스 게임이 MS 메타버스의 핵심이다”라고 했다. MS는 메타버스 접속 기기인 홀로렌즈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소니도 꾸준히 플레이스테이션용 가상현실(VR) 기기를 소개해 왔다. 지난 1월 열린 CES 2022에서는 PS(플레이스테이션) VR2를 공개, 메타버스 시대를 염두에 둔 플랫폼 변화를 예고했다.
국내 게임업체들도 관련 준비에 한창이다. 특히 메타버스와 블록체인을 연계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넷마블은 지난해 8월 글로벌 소셜카지노 게임 3위 스핀엑스를 2조5000억원에 인수했다. 또 넷마블 자회사 넷마블에프엔씨는 지난달 20일 블록체인 게임사 아이텀게임즈를 77억원에 인수했다. 방준혁 넷마블 의장은 “넷마블은 메타버스를 블록체인과 융합해 가상세계가 아닌 두 번째 현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라고 했다.
컴투스는 메타버스 플랫폼 더 샌드박스의 시리즈B 투자에 참여했다. 앞서 메타버스 콘텐츠 기업 위지윅스튜디오에 2000억원 이상을 투자, 지난해 8월 경영권을 인수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대형 게임업계는 이미 클라우드 게이밍에서 메타버스로 게임 플랫폼을 확장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라며 “국내 게임 업계 역시 이런 변화 흐름에 동참하는 추세로, 메타버스와 블록체인의 결합에 선행 투자 중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