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와 LG이노텍이 첨단 반도체 기판 시장에서 맞붙는다. 삼성전기는 베트남에 1조원대의 시설 투자를 결정했고, LG이노텍 역시 본격적인 사업 진출을 알리며 구체적인 투자 규모를 검토 중이다.
12일 전자부품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주력 제품군에서 경쟁 관계에 있지 않지만, 매출액과 영업이익 등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전자부품 업계 1위 자존심 싸움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기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적층세라믹콘덴서(MLCC)가, LG이노텍은 스마트폰용 카메라가 매출의 핵심이다.
매출은 LG이노텍이 앞선다. LG이노텍 매출은 지난해 3분기 누적 기준 9조2226억원으로, 7조5362억원의 삼성전기보다 1조원 이상 많다. 반면 영업이익은 삼성전기가 앞선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3분기 기준 연간 누적 영업이익 1조1286억원을, LG이노텍은 같은 기간 8344억원을 기록했다. 두 회사는 모두 지난해 연간 매출이 나란히 10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두 회사는 업계 라이벌로 꼽히지만, 경쟁 제품이 없어 미묘한 관계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양사의 미묘한 관계는 첨단 반도체 기판으로 알려진 플립칩(FC)-볼그리드어레이(BGA) 시장 진출 이후 확실한 경쟁 관계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FC-BGA는 전자기기에서 반도체를 얹는 기판(PCB)의 일종이다. 기판은 넓은 절연판 위에 회로를 형성하면서 그 위에 올린 반도체 등의 부품을 전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신경망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도체 기판은 모바일용과 PC·서버용으로 구분하는데, PC·서버용은 모바일에 비해 전기적 신호 교환이 많아 훨씬 복잡하고,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PC·서버용으로 활용되는 반도체 기판이 바로 FC-BGA다.
전기차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면서 반도체 기판 수요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비대면·온라인 정보 처리량이 많아지면서 복잡한 반도체를 장착하는 FC-BGA의 기술력도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 인텔과 AMD, 엔비디아 등이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프리스마크에 따르면 반도체 기판 시장은 지난 2020년 12조원 시장을 형성했고, 지난해에는 15조원의 규모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리스마크는 반도체 기판 시장이 2025년까지 연평균 10%씩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면서 이 가운데 FC-BGA는 47%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FC-BGA에 먼저 뛰어든 회사는 삼성전기다. 선제적 투자로 국내 1위는 물론, 생산 능력 기준으로 세계 6위에 올라와 있다. 삼성전기는 FC-BGA에 집중하기 위해 지난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와 카메라 모듈 등에 사용하는 기판(RFPCB) 사업을 중단했다.
베트남 북부 타이응웬성 옌빈산업단지 생산공장에서 만들던 해당 기판의 빈자리는 FC-BGA가 채운다. 지난해 말 이사회를 통해 설비와 인프라 구축을 위해 8억5000만달러(약 1조170억원)의 투자를 결정했다. 투자금은 2023년까지 단계적으로 집행한다. 이를 통해 현재 월 1만6900㎡의 생산능력(시장조사업체 프리스마크 자료)을 2만㎡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LG이노텍은 현재 FC-BGA를 생산하고 있지 않지만, 지난해 11월 FC-BGA 관련 조직을 신설하면서 사업 담당으로 이광태 상무를 임명했다. 이 상무는 신기술·신공법 도입으로 LG이노텍이 통신용 반도체 기판 시장에서 글로벌 1위를 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핵심인력으로 꼽힌다.
LG이노텍은 조 단위의 투자도 검토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안으로 이사회를 통해 정확한 투자금액과 시설지역 등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사업장 위치는 LG이노텍 기판소재사업부가 있는 구미사업장이 유력하다. 기존 생산시설의 일부를 FC-BGA용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또 발광다이오드(LED) 사업에 철수하고, 부지만 남겨둔 파주 LED 공장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LG전자 구미 A3 공장 인수 역시 검토된다. LG이노텍이 단일 사업에 조 단위 투자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만큼 미래 먹거리로 FC-BGA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는 두 회사 모두 모바일용 기판 시장에서 기술력을 보이고 있는 만큼 적기 투자로 생산 설비가 갖춰지면 세계 선두권으로 올라서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두 회사 모두 FC-BGA 기술력에 버금가는 5세대 이동통신(5G)용 밀리미터파(mmWave) 안테나인패키지(AiP) 기판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두 회사는 5G mmWave AiP 글로벌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김지산 키움증권 연구원은 “삼성전기는 이번(1조원) 투자를 계기로, FC-BGA 일류화와 제품 고도화, 고객 다변화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라며 “빠듯한 수급 상황을 보면 FC-BGA 수익성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라고 했다. 김 연구원은 “LG이노텍은 구조적 호황이 예상되는 FC-BGA 시장에 진출해 성장 기반을 확보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