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퍼(반도체 원판) 가격이 뛰면서 반도체 공급망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선 탓이다. 반도체 업계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보통신(IT) 기기뿐 아니라 자동차, 가전제품 등 반도체를 사용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연쇄 가격 인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웨이퍼 제조 업체들이 내년 일제히 시설투자(CAPEX)를 계획하고 있지만, 단기간 해결은 어려워 보여 공급망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16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웨이퍼 가격은 올해 들어 꾸준히 오르고 있다. 세계 1위 실리콘 웨이퍼 제조업체 일본 신에츠화학이 지난 4월 20%의 가격 인상을 발표했고, 이후 세계 2위 일본 섬코 역시 웨이퍼 가격을 20% 올렸다. 3위 대만 글로벌웨이퍼스, 독일 실트로닉도 모두 가격을 인상했다. 국내 유일 웨이퍼 공급업체이자 세계 5위인 SK실트론의 경우 장기 계약으로 아직 웨이퍼 공급가격을 올리진 않았지만, 다음 계약 시점에 가격을 시장가에 맞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웨이퍼 가격 상승은 원재료인 폴리실리콘 등의 가격 상승이 주요인이다. 시장조사업체 PV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폴리실리콘 가격은 1㎏당 36.62달러로, 전주보다 13.3% 상승했다. 올해 초 가격이 1㎏당 11달러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해 3배 이상 올랐다. 여기에 세계 최대 폴리실리콘 생산국인 중국에서 전력난으로 폴리실리콘의 원료인 규소 생산량이 줄어 폴리실리콘 가격은 추가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수요 급증도 웨이퍼 가격을 높이는 원인이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지난 3분기 글로벌 실리콘 웨이퍼 출하량은 36억4900만in²(제곱인치)로, 전년 동기 대비 16.4% 증가하며 분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웨이퍼 출하량은 지난해 3분기 이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올해 전체 출하량은 전년 대비 13.9% 증가한 139억98000in²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SEMI는 “여러 산업 분야에서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실리콘 웨이퍼 출하량이 크게 증가했다”고 했다.
신에츠와 섬코, 글로벌웨이퍼스, SK실트론 모두 내년 웨이퍼 증설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증설 리드타임(증설 착수부터 실제 양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1~2년 사이 웨이퍼 공급 문제가 해결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특히 증설에 2287억엔(약 2조4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섬코의 본격적인 웨이퍼 생산량 증대 시점은 2023년을 예상 중이다. SK실리콘은 지난 7월 3억달러(약 3500억원) 규모의 미국 미시간주 투자계획을 알렸고, 최근 미국 상무부에 6억달러(약 7025억원) 추가 투자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다만 추가 투자는 5년에 걸친 것이어서 단기간 공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차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웨이퍼 가격 상승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산 가격을 밀어올리고 있다. 지난 10월 업계 1위 대만 TSMC는 애플을 제외한 전 고객사에 가격을 10㎚(나노미터) 미만은 15%, 10㎚ 이상은 20% 올리겠다고 통지했고, 앞서 지난해 4분기부터 UMC, 파워칩, VIS 등도 분기마다 가격을 10~15% 올리고 있다. 추가로 UMC는 내년 1분기에도 파운드리 견적을 10% 올릴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DB하이텍, SK하이닉스시스템IC 등도 가격 인상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업계는 파악하고 있다.
웨이퍼 원재료 상승으로 인한 웨이퍼, 반도체 가격의 연쇄적인 인상은 결국 스마트폰 등 IT기기를 비롯해 자동차, 가전제품 등 반도체를 사용하는 다양한 제품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반도체 수급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겪고 있는 자동차 업계는 올해 신차 가격이 꾸준하게 오르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대자동차, 기아의 올해 상반기 승용차 평균 가격은 3872만원으로 지난해보다 3.4% 올랐고, 2년 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10% 인상됐다. 스탤란티스 역시 인기 브랜드인 지프의 국내 신차 가격을 반도체 부족을 이유로 지난 8월부터 인상했다.
스마트폰의 경우 일부 신형이 반도체 가격 인상으로 출시를 취소하는가 하면, PC와 노트북 등 IT 제품 가격도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아수스는 게이밍 노트북 가격을 900달러에서 950달러로 올렸고, HP는 프린터 가격을 전년 대비 20% 인상했다. 가전제품 역시 가격인상 압박을 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장기 계약에 따라 반도체가 필요한 업종의 제품 가격의 인상이 제한적으로 나타났지만, 현재와 같은 원재료, 웨이퍼, 반도체 가격의 동반 상승은 소비자 가격을 끌어올리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라며 “전체 공급망에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실제로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