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해오면서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해외에 진출하는 사업 모델에도 자부심이 컸지만 그보다 더 큰 자부심은 새롭고 건강한 회사 문화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 것에 있었다.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회사 문화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제 부족함과 잘못이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한 발 더 멀리 떨어져서 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모두에게 깊이 사과드린다.”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사과문 중 일부 발췌(2021년 6월 30일)
“‘사업’과 ‘보상’은 제가 20년 일해오면서 늘 가장 고민해온, 고민할 수밖에 없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업 없이 좋은 보상이 이뤄질 리 없고 좋은 보상 없이 좋은 사업이 지속될 수 없다. 솔직히 저도 뭐 이 회사를 떠나기 전에 ‘해진이 형이 쏜다’ 뭐 이런 거 한번 해서 여러분에게 칭찬받고 사랑받고 하는 거 한번 해보고 싶긴 하다.”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중 일부 발췌(2021년 3월 12일)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회사와 관련한 굵직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직접 사내 이메일로 소통하며 전면에 나섰다. 최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한 직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졌을 때와 정보기술(IT) 업계 최대 화두인 직원들의 보상 논란이 일었을 때도 그랬다. 대표이사도, 등기이사도 아니지만, 네이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총수가 본인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이해진은 네이버 ‘GIO’라는 직(職) 하나만 유지하며 대표이사, 사내이사, 등기임원 등 굵직한 자리에서 모두 내려왔다. 보유 지분도 계속 줄였다. 지분율은 3%대(올해 3월 말 기준)로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이해진은 명실상부 ‘네이버 동일인(同一人)’으로 지정돼 있다. 동일인은 기업집단 내 여러 계열사마다 대표가 따로 있지만, 그룹 내 한 명의 사람이 모든 계열사에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뜻으로 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7년 이해진 창업자를 동일인으로 처음 지정한 이후 이 지위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네이버의 개인 최대 출자자이면서 네이버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일본 ‘라인’ 회장이고, 그룹 신규 사업을 위한 GIO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등 실질적으로 네이버를 지배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네이버가 성장할수록 표면적으로는 지분율을 낮춰가면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 중이다. 이는 ‘1등 플랫폼 사업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업계 불문, 타 업종 1등 기업과 손잡으며 우군을 늘려나가는 덕분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KAIST 전산학 석사를 마친 이해진은 1992년 삼성SDS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5년간의 준비를 거쳐 1997년 3월 네이버의 전신인 사내 벤처 ‘네이버 포트’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웹 검색 개발에 뛰어든다. 이후 1999년 6월 이 사내 벤처가 네이버 주식회사로 독립하면서 현 ‘플랫폼 공룡’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다진다.
◇ 최대주주서 물러났지만… “전문경영인도 움직일 수 있는 인물”
1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네이버의 최대주주는 올해 3월 말 기준 지분 10.30%를 보유한 국민연금이다. 이후 4월 28일 주식 일부를 처분, 지분율은 9.99%로 약간 줄었지만, 국민연금은 여전히 최대주주다. 2대주주는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블랙록펀드(5.04%)다. 이해진은 3.73% 지분을 보유 중이다.
네이버가 제출한 분기보고서, 사업보고서 등을 보면 이해진은 상장 직전해였던 2001년 8월부터 최대주주 지위를 유지해 왔다. 2002년 코스닥시장 상장 당시에는 지분이 7.82% 정도였다. 상장 과정에서 새롬기술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개인 주식 1%를 새롬기술에 매도하면서 상장 이듬해 지분을 6%대까지 낮췄다. 이후 시세차익 등을 이유로 지분을 팔아 2009년 4.64%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관계인 지분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네이버 공동창업자인 김범수 현 카카오 의장 등이 회사를 떠나면서 특수관계인에서 제외됐다. 일부는 주가가 오르자 주식을 팔았다. 그 결과 2014년 9월을 기점으로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네이버의 총수로 이해진을 지목했다. 지분율, 사내 직함 등에서는 영향력이 없는 듯 보이지만 경영 활동, 임원 선임 등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 중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네이버는 올해 5월 공정위로부터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대기업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도 지정됐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우리나라의 경우 한 번 총수로 지정되면 중간에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다”라며 “이해진의 경우 지분을 완전히 매각하거나,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소장은 “스스로 낮은 직위를 선택한 것이지, 사실상 전문경영인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네이버 C레벨이면서 이해진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최인혁 네이버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채선주 네이버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가 주요 자회사인 네이버파이낸셜과 네이버아이앤에스 대표를 맡고 있다.
◇ 경영권 방어 어렵다? ‘지분교환’으로 우군 확보
지분 구도만 보면 네이버의 경영권은 매우 취약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네이버가 타 기업들과의 협업으로 만회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분교환으로 맺은 이른바 ‘혈맹’을 통해서다. 지분교환은 말 그대로 서로의 주식을 확보해 주주가 되는 방식이다. 기업 간 협업 구도를 견고히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치이면서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면 ‘백기사’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협력 관계 당사자들과 네이버는 “단순 사업 협력”이라고 설명하지만, 회사 안팎에선 실질적으로 이해진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는 과거부터 ‘지분교환’ 방식의 협업을 이어왔다. 1997년 삼성SDS의 사내벤처로 시작한 네이버는 설립 초기 외부에서 투자를 받으며 지분을 나눠줬고 지분교환 방식으로 검색 기술 관련 기업 등을 사들였다. 이는 회사가 커진 후에도 지속됐다.
상장 이후 첫 지분교환 대상은 미래에셋이었다. 지난 2017년 네이버는 미래에셋대우에 5000억원 규모인 약 281만주(1.71%)의 자사주를 지급하고, 미래에셋대우 지분 7.34%(4729만3364주)를 받았다.
지난해 10월 CJ그룹과도 6000억원 규모의 지분교환을 단행했다. CJ대한통운 3000억원, CJ ENM 1500억원, 스튜디오드래곤 1500억원 등이다. 당시 네이버는 자사주 209만4240주를 처분해 6000억원을 조달했다.
올 1월에는 방탄소년단(BTS)이 소속된 하이브(과거 빅히트)와도 주식 교환 방식의 협업을 맺었다. 규모는 약 4000억원이다.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이마트 1500억원, 신세계인터내셔날 1000억원 등 2500억원(64만8510주) 규모의 자사주를 활용한 지분교환을 발표하기도 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장은 “우호 협약을 맺었다면 추후 의사결정 시 (서로 원하는걸) 주장해주면 되니 (경영권 방어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상근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디지털 산업의 ‘승자독식’ 현상이 심화하면서 플랫폼 사업자인 네이버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지고 있다”며 “협업할 기업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호 세력을 확보하기 수월해졌다는 의미다”라고 분석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 간 지분교환은 순수한 경영 협업일 수도 있고, 경영권 방어 목적일 수도 있다”면서도 “경영권 방어의 대표적인 수단은 지분교환과 제3자배정을 통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