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투자 결정을 놓고 삼성전자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170억달러(약 20조원)를 들여 미국 내 신규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투자 지역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총수 부재로 투자 결정이 지연되면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3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내 신규 파운드리 설립 후보지로 텍사스주 오스틴, 애리조나주 피닉스, 뉴욕주 버팔로를 놓고 막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후보지별 인센티브와 세액 공제 등을 비교하면서 장소별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1일(현지시각)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진행된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미국 내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밝혔다. 회의에 참석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17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계획하고 있으며 조만간 좋은 소식, 구체적인 소식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가 올해 상반기 내에 구체적인 투자 지역과 생산 제품 등을 발표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이터통신은 “삼성전자가 오스틴에 5㎚(나노미터·10억 분의 1m) 극자외선(EUV)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구축할 것으로 결정했다”라며 “이르면 올해 3분기 착공에 들어가 2024년 완공될 예정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현재까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존 테일러 삼성전자 팹엔지니어링 부사장은 지난달 텍사스주 상원의원과의 간담회에서 “현재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공장이 오스틴에 가동 중이지만, 추가 공장 부지 선정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최대한의 인센티브와 세액 공제를 받기 위해 미국의 ‘칩스(CHIPS)법’ 시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칩스법은 미국의 반도체 칩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와 연구비 등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으로, 지난달 초 미 상원의원을 통과, 하원 논의를 앞두고 있다.
칩스법에는 미국 내 반도체 공장 설립을 위한 보조금 100억달러(약 11조원)와 최대 40%의 세액 공제 등의 지원책이 담겨 있는데, 백악관은 정책권고안에 “미국 의회가 최소 500억달러(약 55조6500억원)의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권고안이 받아들여질 경우 삼성전자는 재산세 감면을 포함한 10억달러(약 1조1200억원) 이상의 인센티브 패키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총수 부재와 경기도 평택에 건설 중인 제3공장(P3) 투자 계획 등이 미국 파운드리 투자 결정을 늦추는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파운드리 공장 신설은 해외 단일 투자 규모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결정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전반적인 판단이다.
이 부회장이 광복절에 사면으로 풀려난 뒤 공장 설립 후보지를 직접 방문,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확인하고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투자의 상징성과 무게 등을 고려할 때 이 부회장이 직접 투자를 발표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 건 사실이다”라며 “다만 사면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만큼 섣불리 예단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라고 했다.
삼성전자가 현재 경기도 평택에 세계 최대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이자, 최첨단 공정인 P3를 구축 중인 만큼 미국 투자 결정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사업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투자를 속도에 쫓겨 결정하기보다, 기존 계획에 따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결정하는 게 향후 사업 경쟁력 확보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경쟁 업체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면서 삼성전자를 향한 압박은 계속되고 있다. 파운드리 1위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6개 팹(생산시설)을 짓고 있으며, 추가 증설도 고려하고 있다. 미국 인텔의 경우 애리조나에 2개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최근에는 유럽에도 생산 설비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시설 투자가 사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투자가 늦어지면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라며 “반도체를 둘러싼 국가 간 패권 경쟁이 치열한 만큼 이 부회장 사면을 포함한 경쟁력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