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의 직원들이 자사 EUV(극자외선)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ASML

2019년 일본 수출 규제로 시작된 반도체 소재 국산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소재 자립도를 높여 추가 무역 갈등에 따른 반도체 사업의 불확실성을 낮춰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반면 반도체 장비의 경우 국산화율이 20%대에 그쳐,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SDI는 최근 반도체 제작에 사용되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 개발에 착수했다.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사용하기 위한 8인치 웨이퍼(반도체 원판) 노광 장비 등을 입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SDI가 포토레지스트 개발을 공식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웨이퍼에 도포하는 물질로,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그려 넣는 노광(露光) 공정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포토레지스트는 반응하는 빛의 파장에 따라 종류가 나뉘는데, 일본은 초미세화공정에 사용되는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수출 규제 품목에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포함한 것도 같은 이유다.

포토레지스트가 없으면 반도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이 필수지만, 품질에 대한 신뢰성도 더욱 중요하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대만 TSMC가 2019년 1분기 포토레지스트 품질 문제로 5억5000만달러(약 6500억원)의 손실을 낸 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TSMC는 “12·16㎚(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에서 포토레지스트 오염 사고가 발생했다”며 “이에 따라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다수의 웨이퍼 불량이 일어났다”고 했다.

일본 업체들이 포토레지스트 시장에서 80% 넘는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품질 우수성 때문이다. 국내 중견업체들도 포토레지스트를 만들고 있지만, 신뢰성에서는 여전히 일본 업체들에 밀리고 있다. 그러나 삼성SDI가 개발을 시작하면서 고품질의 포토레지스트 국산화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린룸. / SK하이닉스 제공

식각(蝕刻)액으로 불리는 고순도 염화수소의 국산화 작업도 이뤄진 상태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국내 중견기업 백광산업과 고순도 염화수소 개발에 성공, 품질 테스트를 완료했다. 이르면 연말쯤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공정에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순도 염화수소는 웨이퍼에 그려진 반도체 회로만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을 부식시켜 깎아내는 식각(에칭) 공정에 사용된다. 포토레지스트와 비교해 높은 신뢰성을 요구하진 않지만, 일본 토아고세이와 독일 린데 등이 안정적인 품질을 무기로 90%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에만 고순도 염화수소 수입에 570억원을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수입 의존도를 크게 낮출 것으로 예상된다.

고순도 불화수소 국산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회로를 깎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사용하는 물질이다.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염화수소와 함께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필수 반도체 소재다.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SK머티리얼즈와 솔브레인이 각각 국산화에 성공했다. 특히 SK머티리얼즈는 초미세 공정에 사용하는 초고순도 기체 불화수소 개발에 성공하면서 품질과 안정적인 공급에서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도체 소재 국산화는 가시화되고 있지만 반도체 장비에 대한 해외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반도체 장비는 웨이퍼 가공, 반도체 검사, 반도체 조립, 기타 장비로 나뉘는데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 호황)에 힘입어 장비 수입은 매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반도체 장비 수입액은 48억7000만달러(약 5조5000억원)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EUV 노광 기술을 사용하면 10㎚ 미만의 공정에서 초미세 반도체 칩을 만들 수 있다. /ASML 제공

반도체 장비의 국산화율은 20%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마저도 초미세공정에 필수적인 노광 및 에칭 장비의 경우 100%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는 4개 업체(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ASML, 도쿄일렉트론)가 전 세계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 ASML이 만들고 있는 EUV 노광 장비의 경우 확보 유무에 따라 업체의 기술 경쟁력이 결정될 정도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ASML는 연간 40대 정도의 EUV 노광장비를 만들고 있는데, 이 장비는 내년 생산량까지 이미 선주문이 돼 있는 상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ASML의 네덜란드 본사를 찾은 것도 바로 EUV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에 따르면 노광 분야의 국내 기술 수준은 선진국과 비교해 10%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식각, 증착 장비에서는 일본 도쿄일렉트론과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가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주성엔지니어링, 원익IPS, 유진테크가 증착 장비를 생산하고 있는데, 다행인 건 증착 분야에서는 해외 업체와의 기술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업체들의 기술 수준이 도쿄일렉트론의 90%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도체 장비 국산화를 위한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이 시작된 만큼 장비 국산화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장비 개발을 위해 장비 업체와 협력을 강화하면서 반도체 장비 국산화를 위한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라며 “지난해 시행된 소부장(소재·부품·장비)특별법에 따라 기술 개발을 위한 정부의 지원도 이어지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