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부문 인수에 대한 기업결합 승인이 내려진 가운데, 중국의 움직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반도체 패권을 위해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어깃장을 놓을 경우 올해 안으로 주요 국가의 반독점(기업결합) 심사를 통과해 인텔 낸드 부문 인수를 마무리 지으려던 SK하이닉스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7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기업결합 심사를 진행하기 위해 국내 대형 로펌인 김앤장(K&C)을 비롯해 미국 스캐든압스슬레이트미거앤드플롬과 중국 팡다 파트너스 등을 법률자문사로 구성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인수합병(M&A)은 시장과 각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이해관계가 얽힌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기업결합과 관련한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는 M&A로 몸집이 불어난 해당 기업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기업결합 심사는 각국의 반독점 기구가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독점규제법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가 맡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인텔 낸드 부문은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영국, 브라질, 싱가포르, 대만 등 세계 9개국에서 기업결합 심사를 받는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와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는 각각 지난해 말과 올해 3월 기업결합 승인을 했고, 유럽 반독점심사기구(EC) 역시 지난 21일 무조건부 승인을 결정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 영국 등에서는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인수는 독점 우려가 적다는 점에서 주요 국가들이 기업결합을 불허하는 결과를 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지난해 4분기 기준 SK하이닉스는 점유율 11.6%로 시장 4위, 인텔은 8.6%로 6위로, 점유율(합산 20.2%)을 합쳐도 1위 삼성전자(32.9%)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인텔 낸드 인수 후)를 합한 한국 기업의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53.9%로, 같은 메모리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도 격차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와 인텔 낸드 부문이 결합하더라도 시장 독점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힘든 구조다”라며 “경쟁제한성이 낮아 독점 우려가 적다”고 했다.
다만 이런 전망과는 다르게 중국이 어깃장을 놓을 경우 SK하이닉스와 인텔의 기업결합은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게 업계 관측이다. 최근까지도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간 M&A를 다수 승인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이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SK하이닉스-인텔 낸드 부문의 M&A에서도 비슷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3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일본 반도체 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이 체결한 22억달러(약 2조4500억원) 규모의 M&A를 무산시켰다. 미국의 수출 규제 등에 반발한 중국이 두 기업 간 M&A에 대한 독과점 심사를 고의로 9개월 이상 지연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인수 대금이 30억달러 이상으로 증가한 미 어플라이드는 고쿠사이의 인수를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어플라이드는 인수 계약을 취소하면서 1750억원의 위약금도 지불했다.
앞서 지난 2018년 7월 중국은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의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NXP의 인수 건에도 몽니를 부렸다. 당시 스티븐 몰런코프 퀄컴 최고경영자(CEO)는 “인수 마감 시한까지도 중국 상무부 승인이 나지 않아 NXP 인수를 포기하게 됐다”라고 했다. 퀄컴은 투자자 보상 차원에서 300억달러(약 33조5000억원)의 자사주 매입을 추진했고, 20억달러의 위약금도 물었다. 9개 심사국 가운데 퀄컴-NXP 인수에 반대한 건 중국이 유일했다.
지난해 10월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ARM을 400억달러(약 44조676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미국 엔비디아 역시 중국 어깃장에 수개월째 인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지 못한 상태다. 현재 중국은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이유로 반대 입장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ARM 중국 법인인 ARM차이나는 영국 본사를 상대로 회사 지배권과 관련한 소송도 제기했다. ARM차이나는 중국 정부 산하 기관이 포함된 컨소시엄이 51%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이 M&A는 모두 미국 기업이 추진한 것으로, 인수 대상자가 미국 회사인 SK하이닉스와 인텔 낸드 부문 M&A와는 결이 다르다는 해석도 있다. 더욱이 SK하이닉스가 우시 등 중국 내 투자를 늘려가는 중이고, 이번 인수에 인텔의 중국 사업장인 다롄 팹(공장) 등 중국 쪽 자산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심사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차이나플래시마켓은 “SK하이닉스의 해외 전체 매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33.4%에서 2018년 38.8%, 2019년 46.4%로 늘고 있어 중국 시장 의존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라며 “우시 D램 1, 2기 팹에서 생산을 시작한 가운데, 인텔의 다롄 팹도 가져가게 되면 SK하이닉스의 중국 시장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어 “메모리반도체는 꾸준한 투자가 필요한 장주기 산업이다”라며 “SK하이닉스의 다롄 팹 인수는 (중국 내) 생산 능력의 확충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 90억달러(약 10조500억원)에 인텔 낸드 부문을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인수 대금을 지불하지 않은 가운데, SK하이닉스는 반독점 심사가 완료될 것으로 보이는 올해 말 1차 대금 70억달러(약 7조8000억원)를 인텔 측에 지급하고, 나머지 20억달러(약 2조2500억원)는 오는 2025년에 지불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