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용 반도체(MC), 전력반도체(PMIC), 디스플레이 구동용칩(DDI), 상보성금속산화반도체 이미지센서(CIS) 등 8인치(200㎜)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기반한 반도체의 전 세계적인 공급부족(쇼티지) 사태가 나타남에 따라 이를 만드는 8인치 파운드리 몸값도 오르고 있다.
국내의 경우 파운드리 글로벌 시장 점유율 10위의 DB하이텍이 8인치 웨이퍼를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는데, 최근 가동률이 100%를 초과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반도체 업계는 최근 이 회사의 8인치 파운드리 증설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자회사를 통해 8인치 파운드리 사업을 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최근 현재의 생산능력을 2배 이상 늘리는 투자 계획을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증설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인수합병(M&A)도 노리겠다는 입장이다.
◇ 코로나19로 8인치 웨이퍼 반도체 수요 급등
18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1990년대 초부터 반도체 생산의 주력으로 올라선 8인치 웨이퍼는 2000년대초 12인치 웨이퍼의 등장으로 점차 업계 비중이 작아졌다. 통상 반도체는 한 장의 웨이퍼에서 얼마나 많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생산성이 결정되기 때문에 8인치보다 크기가 큰 12인치가 유리한 부분이 있다.
다만 8인치와 12인치 웨이퍼는 생산 제품의 크기와 성격이 조금 달라 나름대로의 영역을 각각 구축하고 있다. 8인치의 경우 12인치에 비해 부가가치는 낮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해 개별 소자와 자동차용 반도체, PMIC, CIS 등 아날로그 반도체에 집중돼 있다. 이 아날로그 반도체는 선폭이 너무 좁으면 성능이 떨어질 수 있어 미세공정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작다. 특히 고압 전류가 흐르는 PMIC는 회로 선폭이 너무 좁으면 열 관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크기를 더 작게 만들 이유가 없다.
12인치는 소품종 대량생산에 어울린다. 미세공정의 등장으로 반도체 크기가 작아지면서 생산성도 크게 늘었다.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와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로직반도체를 만든다. 이 반도체들은 큰 원판에서 미세공정을 십분 활용, 대량의 반도체를 찍어내듯 생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글로벌 반도체 쇼티지는 현재 아날로그 반도체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파운드리 투자가 12인치 위주로 흘러가면서 8인치 생산능력은 거의 정체돼 있는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아날로그 반도체 등 8인치 웨이퍼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매년 거의 같은 생산능력을 유지해왔던 8인치 파운드리는 기존의 생산력으로는 늘어난 수요를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8인치 파운드리가 다시 주목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분간 아날로그 반도체 등의 수요가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소품종 다량생산에 적합한 8인치 파운드리가 코로나19 사태로 부활했다”며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에서부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8인치 웨이퍼로 생산한 반도체를 찾고 있어 반도체 공급 문제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 세계 10위 DB하이텍, 2년 넘게 가동률 100%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10위인 DB하이텍은 8인치 파운드리 호황에 힘입어 올해 1분기 2437억원의 사상 최대 매출을 새로 썼다.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6% 줄어든 606억원에 그쳤지만, 이는 장비 감가상각비가 늘어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DB하이텍은 지난 2019년 4월부터 25개월째 공장 가동률이 100%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DB하이텍의 생산능력은 웨이퍼 투입량 기준으로 월 13만장 수준이다.
반도체 업계는 DB하이텍이 당장 증설에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미국의 중국 SMIC 제재로 인해 DB하이텍이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점은 증설 가능성을 더욱 키우는 부분이다. 코로나19 수요 증가에 SMIC 물량까지 8인치 웨이퍼 수요 상당수가 DB하이텍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회사는 아직 증설 가능성에 대해 신중론을 견지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 수요가 유동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증설 결정 후 장비 반입 후 양산까지는 최소 2년여가 걸릴텐데, 호황이 그 전에 끝나버리면 투자금 회수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다품종 소량생산인 8인치 파운드리는 투자 대비 이익이 크지 않다는 점도 고려하고 있다.
대신 DB하이텍은 생산 효율 조정 등을 통해 가지고 있는 생산능력을 최대한 높이고 있다. 현재 경기 부천시와 충북 음성군에 있는 2개의 공장에서 생산량 총 월 9000장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회사 관계자는 “2개 팹(공장) 모두 풀가동을 유지하고 있고, 고객 수주 역시 연말까지 견조할 전망이다”라며 ”생산성 향상 활동을 통해 월 9000장 규모를 더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최근 정부는 국내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위해 파운드리 증설에 최대 1조원 이상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벌써 증설 의향을 밝힌 기업은 9개에 이른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이 기업들은 약 2조원의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는 이 기업들 중 한 곳이 DB하이텍이라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부터 DB하이텍 측은 정부에 투자 지원을 요구해 왔다”고 했다.
◇ “8인치 생산능력 2배 확대” SK하이닉스…키파운드리 M&A 검토 중
8인치 파운드리 호황으로 SK하이닉스 역시 관련 생산 능력을 이전보다 2배 이상 높이는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각자 대표 겸 부회장은 최근 정부의 ‘K-반도체 전략’과 관련 “현재보다 파운드리 생산능력을 2배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라며 “국내 설비 증설,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SK하이닉스는 자회사인 SK하이닉스시스템IC를 통해 8인치 파운드리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월 생산량은 웨이퍼 기준 10만장쯤이다. 다만 충북 청주에 있는 파운드리 설비는 올해 안으로 중국 우시 사업장으로 모두 옮겨갈 예정이다. 이에 따라 설비가 빠진 청주 사업장의 유휴(비는) 부지를 활용한 증설이 예상되고 있다.
이 경우 장비 확보가 관건이다. 이미 다수의 파운드리들이 8인치 장비를 정리해 지금부터 장비를 갖춘다고 해도 속도 있는 증설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생산업체들도 거의 사라졌다. 박 부회장이 파운드리 생산능력 확대를 위해 M&A도 함께 검토하겠다고 한 건 이런 시장 상황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이미 M&A 대상으로 키파운드리가 거론되는 중이다. 키파운드리는 8인치 파운드리로, 1979년 세워진 LG반도체가 모체다. 이어 1999년 현대전자와 합병한 하이닉스반도체에 소속됐다가 2004년 분사한 매그나칩으로 사업부가 옮겨졌고, 이어 2020년 4월 매그나칩에서도 분리돼 독자 사업을 펼치고 있다. 키파운드리는 SK하이닉스가 지난해 3월 지분 49.8%를 취득한 매그너스사모펀드(PEF)에 팔렸는데, 당시 SK하이닉스는 2073억원을 투자했다. 여러모로 SK하이닉스가 친정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키파운드리는 현재 8인치 웨이퍼 기반 업체로 1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상 공정에서 DDI, CIS 등을 만든다. 생산능력은 웨이퍼 투입량 기준으로 월 8만2000장으로, SK하이닉스시스템IC와 비슷하며, 인수한다면 ‘생산능력 2배 확대’라는 목표에 맞는다. 생산공장 역시 SK하이닉스의 충북 청주 공장 인근이다. SK하이닉스의 출자금을 고려하면 완전 인수에 필요한 자금은 3000억~4000억원 수준으로 점쳐진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8인치 파운드리 생산능력 확대에 먼저 언급한 증설은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라며 “왜 중국 우시 공장 증설에 청주 공장의 장비를 가져가는지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결국 M&A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키파운드리다”라며 “애초부터 하이닉스반도체 소속이기도 했고, 현재 키파운드리를 보유한 사모펀드에 지분 투자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