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약사 릴리의 원형탈모약 '올루미언트' 국내 도입이 늦어질 전망이다. 정부가 올루미언트를 비롯한 JAK억제제 계열 치료제가 심혈관계 질환 등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며 처방에 제한을 두는 규제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올루미언트를 원형탈모약으로 쓰려면 기존 허가절차에 더해, 이번 규제를 적용받을지 여부까지 검토받아야 한다.
문제는 규제 범위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의약품청(EMA)도 JAK억제제 관련 규제를 두고 있지만 약 성분, 환자 질환에 따라 규제가 다르게 적용된다. 반면 국내 규제는 약과 질병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규제를 좀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31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JAK억제제인 올루미언트를 국내에서 원형탈모약으로 쓰기 위한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유통사인 한국릴리는 지난 6월부터 원형탈모약 허가를 위한 내부 논의를 시작했으나, 언제쯤 정부에 허가 신청을 넣을지 대략적인 시점조차 정하지 못했다.
JAK(야누스키나제)는 면역·염증반응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조절하는 효소로 류머티스관절염, 원형탈모 등 자가면역질환 발병과 연관돼있다. JAK억제제는 JAK의 작동을 막아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한다. 특히 올루미언트는 원형탈모 발병에 핵심이 되는 JAK를 선택적으로 억제, 스테로이드 등 기존 치료제보다 효과가 훨씬 뛰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올루미언트는 현재 국내에서 류머티스관절염, 아토피 치료제로 사용 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FDA가 올루미언트를 원형탈모 치료제로도 허가하면서, 국내에서도 곧 원형탈모 적응증을 추가하리란 기대감이 생겼다.
그런데 정부가 다음 달부터 시행하는 JAK억제제 관련 규제로 처방 조건이 전보다 까다로워지면서 상황이 꼬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외국계 제약사 관계자는 "정부 규제로 JAK억제제를 취급하는 제약사 모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며 "현재로선 이번 규제가 처방 현장과 제품 매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는 것에 집중하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앞서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지난 8월 JAK억제제에 대해 의약품 허가 변경 명령을 내렸다. JAK억제제가 심혈관계 질환, 암 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에 따라 다음 달 1일부터 ▲65세 이상 ▲심혈관계 고위험군 ▲악성종양 위험 존재 등 3개 환자군은 '기존 치료제에 적절히 반응하지 않거나 내약성이 없는 경우'에만 JAK억제제를 쓸 수 있다.
이번 규제로 올루미언트는 물론 원형탈모 치료제로 새롭게 개발 중인 다른 JAK억제제의 국내 도입 또한 늦어질 수 있다. 화이자는 지난달 말 FDA와 EMA에 원형탈모 치료제 '레디시티닙' 허가를 신청했다. 한국화이자 관계자는 "미국, 유럽에서 허가를 받은 후엔 한국 등 다른 주요 국가에도 허가를 신청하는 게 보통이다"라며 "다만 한국은 규제 관련 이슈가 있어 상황을 예의주시 중이다"라고 말했다.
식약처는 JAK억제제가 새로 허가를 받거나 이미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적응증만 늘리는 경우, 내부 검토를 추가로 거쳐 규제 적용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이번 규제가 모든 JAK억제제에 무조건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상 규제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내에 허가된 JAK억제제는 ▲토파시티닙 ▲바리시티닙 ▲유파다시티닙 ▲아브로시티닙 ▲필고티닙 등 5개 성분 67개 품인데, 이들 모두 새로운 규제 적용을 받는다. 이 중 FDA와 EMA 등 글로벌 규제당국이 심혈관계 질환, 암 등 부작용을 문제 삼은 성분은 토파시티닙, 바리시티닙, 유파다시티닙이다. 아브로시티닙과 필고티닙 성분은 별다른 안전성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음에도 이번 규제 적용 대상에 들어갔다.
이에 성분과 적응증에 따라 규제가 세분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모발학회 관계자는 "JAK억제제는 매우 다양한 질병 치료에 쓰이고 성분 종류도 한두가지가 아니다"라며 "모든 JAK억제제에 한 가지 규제만을 일괄 적용하는 건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불합리한 조치다"라고 말했다.
FDA와 EMA 모두 JAK억제제에 대한 규제가 있으나 국내보다 세분화돼있다. FDA는 TNF억제제 등 치료제에 반응하지 않는 환자들만 JAK억제제를 쓸 수 있게 했다. TNF억제제는 류머티스관절염, 건선 등 치료에 쓰는 약으로 원형탈모와 무관하다. 일부 환자군 대상으로만 규제를 적용한 것이다. EMA는 토파시티닙 등 일부 성분에 대해서만 처방 규제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