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을 치료하는 소프트웨어를 디지털 치료제(DTX⋅치료기기)로 개발하는 A사는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의료기기 임상 신청을 했다가 두 차례 반려당했다. 식약처는 이 소프트웨어가 환자한테 의학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입증하는 자료를 추가로 요구했다고 한다. A사는 수차례 보완 끝에 지난해 연말 임상 계획을 최종 승인 받았고, 허가의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확증 임상 중에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디지털 치료제 개발 시도가 잇따르고 있지만, 식약처 임상에도 진입하지 못하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가 의료기기로 임상을 시작하려면, 해당 질환의 치료 효과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입증해야 하는데, 일반 소프트웨어를 ‘디지털 치료제’라고 이름 붙이고 허가를 받으려는 업체들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디지털 치료제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식약처의 허가를 받고 디지털 치료제로 임상을 진행 중인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 업체는 10개로 집계됐다. 디지털 치료제는 질병을 예방·관리,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소프트웨어(SW)를 뜻한다. 업계에서는 치료제라는 용어를 쓰지만 식약처에서는 ‘의료기기’라는 명칭을 권고한다. 치료제라고 하면 신체에 직접 쓰이는 약물과 혼동할 수 있다는 이유지만, 업계는 하드웨어인 의료기기와 소프트웨어인 디지털 치료제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디지털 치료제에 대한 임상은 1상 2상 3상으로 구분되는 약물과 달리 탐색임상과 확증임상 두 단계로 나뉜다. 5월 현재 국내에서 확증 임상을 진행하는 업체는 웰트, 에임메드, 하이, 뉴냅스, 라이프시맨틱스 등 다섯 곳이다. 최근 들어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겠다는 업체는 수백 수천곳으로 늘었는데, 이른 시일 안에 디지털 치료제로 국내 허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단 5군데에 불과하단 뜻이다.
식약처 허가를 받아 국내 임상을 하는 업체가 적은 것은 ‘의료기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디지털 치료제로 임상을 시작하려면, 디지털 치료제가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는지, 질병을 예방·관리·치료하기 위한 목적인지를 명확히 식약처에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서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대부분의 기업은 치료의 작용 기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도 “예컨대 무용으로 우울증을 치료하겠다고 하면서 임상을 신청하겠다는 업체도 있었다”며 “아무런 의학적 근거도 없이 임상 신청 접수 문턱도 못 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소프트웨어가) 의료기기로 식약처 허가를 받으려면 일반 (소프트웨어) 제품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데, 의료기기를 만들어보지도 않은 업체들이 디지털 치료제를 만들겠다고 나선 경우가 꽤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의료 관련 규제를 모르는 업체들이 임상 접수부터 난항을 겪지만, 막상 임상에 들어가고 나면 진행은 빠르게 된다”며 “이르면 올해 안에 국내에서 첫 허가를 받는 디지털 의료기기 업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에서 인정하는 디지털 치료제로는 ▲인지재활훈련을 통해 알츠하이머 치매를 예방하는 소프트웨어 ▲위암 환자를 대상으로 메스꺼움이나 통증 등 부작용을 모니터링하고 약물 투여량을 조절하도록 관리하는 소프트웨어▲인지행동치료(CBT)로 흡연 등의 금단 증상을 완화하는 소프트웨어 등이 있다.
하지만 디지털 치료제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로 ‘바이오·디지털헬스 글로벌 중심국가 도약’를 제시하고, 디지털 치료기기, AI진단보조 등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도 최근 디지털헬스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위원 공모 절차에 들어갔다.
20개 이내의 회원사 대표나 총괄 임원 등으로 구성하고, 관련 학계 전문가 등의 자문위원단을 둘 계획이다. 협회 관계자는 “위원회 역할은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것과 관련해 정부 부처 및 유관 단체와 업무 협력을 하는 것”이라며 “R&D를 포함해 인프라 구축에 소요되는 비용 등 재정적인 지원, 인허가 관련 규제 개선 등 포괄적인 지원을 하는 게 목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