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3일 서울의 한 약국에서 약사가 종합감기약이 다 팔려 텅 빈 선반을 가리키고 있다. /뉴스1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 20만~40만명씩 쏟아지는 가운데 일부 환자들이 여러 병원을 돌며 복수의 처방전을 받은 후, 각기 다른 약국을 찾아 처방약을 한꺼번에 타 가는, 이른바 ‘감기약 사재기’가 극성이다. 정부가 감기약 제조공장을 찾아 생산을 독려하고 있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사재기 탓에 일선 약국에서는 일반 감기약은 물론 처방약도 수급이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병원 돌며 처방약 쓸어 담는 확진자

1일 일선 약국에 따르면 최근 타이레놀, 스트렙실 등 처방전 없이도 약국 등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일반 감기약은 물론, 처방전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전문 감기약도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전문약 품귀 현상을 두고 의료계에서는 ‘처방전 사재기’ 현상을 지목했다.

최근 동네 병원 여러 곳을 돌면서 비대면 진료를 통해 처방전을 받은 후, 각각 다른 약국에서 호흡기 전문 처방약을 대량으로 받아가는 코로나19 환자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관악구 사랑의병원 조서영 간호과장은 “최근 한달 사이 코로나19 환자 중에서 처방전을 여러개 써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조 과장은 “최근에는 코로나 환자 10명 중 3명은 이런 요구를 한다”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원 주변 약국 4~5곳에 전화를 돌려도 코로나 환자 처방에 필요한 약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약국에서 수령하지 않아서 폐기 처분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서울 시내 한 약사는 “중복 처방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환자들 몇몇은 처방을 받아 놓고 아예 약국에서 약을 가져가지도 않는다”며 “그렇게 환자가 수령하지 않아 남은 약은 보건복지부 고시에 따라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21일 서울의 한 약국에서 관계자가 "감기약 판매가 늘고 재고가 부족하다"며 제품을 꺼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환자들이 수령 안 한 처방약은 폐기 처분

코로나19 감기약 사재기가 성행하는 것은 확진 이후 한 달 이상 증상이 지속되는 ‘후유증(롱 코비드)’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 의료계 분석이다. 서울 구로구에서 내과를 운영하는 이모 원장은 “코로나 증상이 한 달 넘게 계속된다는 것을 걱정하는 환자들이 약을 한 번에 많이 처방해 달라고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가 1급 감염병이기 때문에 확진자에 대한 진료와 약값이 모두 무료인데, 환자들이 이를 악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서울의 한 약사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진료와 약값이 무료라는 생각에 최대한 많이 약을 받아가려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처방 받은 약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약사는 “보통 조제 과정에서 제품 포장을 뜯고 소분한 약의 유통기한은 기껏해야 4주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약 사재기 행태를 막는 의약품 안전사용서비스(DUR)가 있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다. DUR에는 환자가 언제 어떤 병으로 무슨 약을 처방받았는지 이력이 남는다. 일정 기간 내에 성분이나 효능이 같은 약을 처방받은 이력이 있으면 의사가 곧바로 알 수 있지만, 처방은 의사의 고유권한이다.

서울 송파구 김모 약사는 “DUR에 성분이나 효능이 중복된다는 알람이 떠도 똑같은 약들을 처방하는 병원들이 있다”며 “약국 입장에선 조제 거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감하다”라고 했다. 조 과장은 “단골환자를 대상으로 한 동네 병·의원들은 DUR에 중복 처방이 뜨더라도, 환자에게 처방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약사회는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달 29일 보건복지부에 ‘코로나19 치료 의약품 처방일수를 한시적으로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안서를 제출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병원과 약국에서 처방·조제를 거부하기는 힘들다면, 정부가 코로나19 관련 감기약은 처방일수를 제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환자라도 무조건 일주일치 약을 줄 것이 아니라, 증상이 가볍다면 2~3일치 약만 처방하고, 상황에 따라 추가 처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처방일수 축소를 논의 중인 것은 맞는다”면서도 “환자에게 약이 얼마나 필요한지 판단하고 처방하는 것은 일선 의사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