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3시, 경기 화성시 양감면의 카텍에이치 공장에서는 드럼세탁기처럼 생긴 기계 5대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숯처럼 검은 파편들이 이 세탁기에 들어가더니 1시간 후 미역 줄기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나왔다. 작업 중이던 업체 관계자는 “미역 줄기가 아니라 탄소섬유다”라며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버려진 헬기 본체(검은 파편)를 탄소섬유로 재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텍에이치는 탄소섬유를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면서도 높은 품질로 재활용할 수 있는 독자 기술을 가졌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2017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을 이전받아 같은 해 창업해 현재 2025년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날 둘러본 화성 공장은 대량생산 시설을 구축하기 전에 양산 제품 샘플을 만들고 품질을 시험하는 시설(테스트베드)로 가동되고 있었다.
철근에 시멘트를 바르는 것처럼 탄소섬유에 에폭시라는 물질을 결합하면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CFRP)’이라는 고성능 신소재로 만들 수 있다. CFRP는 강철보다 10배 단단하면서도 4배 가볍다. 기술 발전으로 제조 비용이 점점 낮아지면서 자동차, 항공기, 연료탱크 등에 들어가는 차체 소재가 강철과 알루미늄에서 CFRP로 점점 대체되고 있다.
BMW는 2013년부터 전기차 i3, 하이브리드카 i8 등에 CFRP를 사용했다. 이어 도요타 등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자사 제품에 들어가는 CFRP 비중을 높이고 있다. 같은 이유로 항공기의 차체와 날개에도 쓰이고 있다. KAI는 T-50 항공기와 현재 개발 중인 국산 최초의 기동 헬기 수리온에 이 소재를 사용한다. 향후 대중화되면 낚시대, 자전거 등 스포츠, 생활용품에도 널리 쓰일 전망이다. CFRP는 현재 전 세계에서 일본 기업 도레이 등이 연간 총 18만t을 생산하고 있고, 매년 생산량이 증가하는 추세다.
CFRP의 가격을 낮추는 방법 중 하나는 핵심 재료인 탄소섬유를 재활용하는 것이다. 카텍에이치에 따르면 CFRP 1㎏을 만드는 데 약 3만5000~5만원의 비용이 든다. 버려진 CFRP에서 에폭시를 제거한 후 탄소섬유를 재활용한다면 CFRP 제조 비용과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재활용 기술로 재생 CFRP 1㎏을 만드는 데는 15~20달러(약 1만7000~2만2000원)가 든다고 한다.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보다 비용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다.
하지만 재생 CFRP를 상용화하기에는 여전히 비용이 많이 드는 편이다. 재생 CFRP는 일반 CFRP보다 품질이 낮을 수밖에 없어, 저가형 제품으로 만들어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진호 카텍에이치 대표는 “재생 CFRP가 상용화되려면 가격이 일반 CFRP의 3분의 1 정도로 낮아져야 한다”며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1㎏당 10달러(약 1만1000원) 이하의 비용으로 CFRP를 재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폐CFRP에 700℃ 온도의 열을 가해 에폭시를 태워버리는 ‘열소각법’을 활용하고 있다. 이 방법은 에폭시뿐만 아니라 탄소섬유까지 열에 손상되는 단점을 갖고 있다. 일본 기업 도레이가 이 기술로 얻을 수 있는 고품질 탄소섬유의 수율(불량 없는 양산율)은 40~45%에 그치고 있다. 폐CFRP 속 탄소섬유 중에서 절반 이상은 열에 손상돼 버려진다는 것이다.
지난 2017년 KIST 연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뜨거운 열을 가하지 않고도 에폭시를 없앨 수 있는 화학 물질과 이것을 활용하는 ‘화학적 분해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빨래할 때 세제를 사용하는 것처럼 낮은 온도에서도 ‘에폭시 세탁’이 가능해진 것이다. 정 대표는 “탄소섬유 손상을 크게 줄여 수율을 80~90%로 높였다”며 “재활용 공정에 필요한 설비 구축 비용은 기존 100억원에서 10억원으로, 설비 유지 비용도 기존의 4분의 1로 줄였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 정 대표와 연구진을 따라 테스트베드 시설을 둘러봤다. 마침 KAI로부터 헬기에 쓰였던 폐CFRP가 대형 트럭에 실려 이곳에 도착했다. 작업자들은 이것을 세척한 후 포대에 담아서 첫 공정인 ‘파쇄 라인’으로 보냈다. 본격적인 재생 작업 전에 폐CFRP를 크기와 모양이 작고 고른 파편으로 만들기 위해 압출 기계로 강하게 눌러 부수는 과정이다.
연구자들은 부서진 파편 중 하나를 실험실로 가져가 물질 특성을 분석했다. CFRP 제품마다 강도, 탄성, 에폭시 함유량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파악해야 특성별로 맞춤 재생 공정이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공정인 리사이클(재활용) 라인에는 드럼세탁기처럼 생긴 ‘화학 반응 기기’ 5대가 놓여 있었다. 특수한 화학 물질이 담긴 이 기계에 폐CFRP를 이곳에 넣고 세탁기처럼 돌리면 화학 반응을 통해 에폭시가 때처럼 빠져나간다. 폐CFRP에서 에폭시를 제거하고 남은 탄소섬유는 미역 줄기처럼 생겼지만 직접 만져보니 낚싯줄처럼 질기고 팽팽했다. 화학 반응 기기 1대당 한번에 폐CFRP 150㎏을 넣어 탄소섬유 80~100㎏을 뽑아낼 수 있다. 폐CFRP 특성에 따라 한번에 1~3시간이 소요된다.
작업자들이 재생 탄소섬유를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다른 라인으로 옮겼다. 실제로 에폭시가 모두 사라졌는지를 검사하는 열분석, 재생 탄소섬유를 고객사들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키친타월 같은 천, 짧은 가닥(촙), 분말(밀)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가공하는 후처리 공정이 이어서 이뤄졌다.
카텍에이치는 연간 폐CFRP 처리량 기준으로 6000t 규모의 생산 시설을 2023년까지 구축할 계획이다. 업체는 연간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폐CFRP 18만t 중 10%인 1만8000t이 재활용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재생 CFRP 시장의 3분의 1을 선점하겠다는 계획이다. 상용화 직후 연 매출은 1500억원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카텍에이치는 상용화 준비가 끝나는 대로 KAI, 국방부, 대한항공, 현대자동차, 롯데케미칼, 한화큐셀, 일진그룹 등과 폐CFRP 처리 및 재생 탄소섬유 공급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현대차와는 수소차에 들어갈 수소탱크 공급과 관련해 논의 중이다. 수소탱크는 가벼우면서도 튼튼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처리 비용도 높아 재생 탄소섬유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