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들이 잇따라 유럽과 맞닿은 북아프리카 국가 모로코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유럽연합(EU)의 관세를 우회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모로코 항구도시 탕헤르에서는 500만㎡ 규모의 농업지대가 자동차 부품 클러스터로 탈바꿈했다. 이곳에는 센추리 타이어 공장, BTR 배터리 공장, APG 브레이크 공장 등 10여 개 중국 기업이 공장을 가동 중이거나 건설하고 있다.
올해 탕헤르에 7000만 달러(약 1060억원) 규모의 공장을 설립할 예정인 APG의 프로젝트 책임자 차이쥔제는 해당 공장이 현지 노동력과 자재를 중국산 부품·기술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라며 "유럽에 있는 공장 인근에서 필요한 물품을 경쟁력 있는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탕헤르와 카사블랑카 사이에 위치한 케니트라에서도 중국 배터리 업체 고션이 13억 달러(약 2조원) 규모의 대형 공장을 건설 중이다. 메디 라라키 모로코·중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 투자 사절단 2~3개 팀이 매주 모로코를 방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투자 열풍에 힘입어 모로코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직접투자(FDI) 프로젝트 발표 규모는 2023~2025년 약 60억 달러(약 9조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중국이 지원한 북아프리카 투자 프로젝트는 모로코 19건, 이집트 9건, 알제리 6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아랍에미리트(UAE·3건), 사우디아라비아(2건), 카타르(1건)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중국 기업들이 잇따라 모로코에 공장을 짓는 이유는 유럽 수출이 용이한 지리적 이점과 함께 관세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로코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마주하고 있다. 최근 중동 정세가 불안한 점도 중국 투자자들 사이에서 북아프리카의 매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모로코 역시 법인세 5년 면제, 젊은 노동력, 친환경 에너지 공급, 그리고 EU와 미국을 포함한 약 50개국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을 앞세워 해외 기업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율 관세를 통해 중국 자동차의 유럽 시장 잠식을 막으려 했던 EU로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EU는 중국 정부의 전기차 산업 보조금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5%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업의 생산품이 모로코산으로 인정받을 경우 무관세로 EU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은 FT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기업들의 모로코 투자가 중국의 과잉생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대유럽 수출품을 제3국을 거쳐 우회 수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며, "유럽에 매우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중국 기업들의 관세 회피 전략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EU가 모로코산 차량용 알루미늄 휠에 상계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EU는 해당 제품이 모로코뿐 아니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과 연계된 불공정 보조금의 혜택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중국 기업들이 모로코를 관세 회피를 위한 수출 기지로 활용하더라도 이를 규제하기 쉽지 않다. 르노와 스텔란티스 등 유럽 자동차 업체들 역시 모로코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EU 당국자들은 FT에 중국과 모로코 간 협력이 실질적인 산업 협력인지, 아니면 EU 관세를 우회하기 위한 전략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EU가 유럽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추진 중인 산업가속화법안(IAA)에서 모로코를 유럽산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원산지로 인정할지 여부가 향후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이 법안은 자동차·철강·시멘트·알루미늄 등 전략 산업과 풍력터빈 등 친환경 산업의 공공조달 및 보조금 지급 과정에서 '역내 제조' 요건을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런던 소재 글로벌정책연구소의 국제무역 책임자인 밥 새빅은 "중국산 중간재가 북아프리카로 운송된 뒤 제한적인 가공 과정을 거쳐 특혜 무역협정에 따라 EU로 수출된다"며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EU의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 전략과 중국의 '오프 쇼어링(offshoring·산업 해외 이전) 전략이 이 지역에서 맞물리면서 북아프리카가 더욱 치열한 경제적 경쟁의 무대로 떠오를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