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폴크스바겐이 202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자율주행 밴 택시 상용화를 목표로, 미국 자율주행 스타트업 아르고 AI와 함께 시범 운행한 레벨 4 수준의 전기 ID. BUZZ AD(자율주행). 폴크스바겐은 2022년 10월 아르고 AI와 결별했다. /폴크스바겐

2022년 10월 26일, 미국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아르고(Argo) AI’의 폐업 발표는 자율주행 산업계에 충격을 던졌다. 아르고 AI는 2016년 설립 후 자동차 업계로부터 막대한 투자금을 끌어모으며 자율주행 개발 분야의 별로 떠올랐다. 미국 완성차 기업 포드(Ford)가 2017년 10억 달러(약 1조2600억 원),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사인 독일 폴크스바겐(Volkswagen)이 2020년 26억 달러(약 3조2700억 원)를 투자하며 아르고 AI를 키웠다. 2021년 7월 미국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 리프트(Lyft)는 아르고 AI 지분 2.5%를 사들이며 포드·아르고 AI와 함께 자율주행 로보택시 사업에 뛰어들었다. 완성차 제조사, 자율주행 기술 개발사, 차량 호출 플랫폼이 손을 잡으며 로보택시 사업을 위한 필수 3요소가 완성됐다. 리프트의 지분 투자 당시 아르고 AI의 기업가치 평가액은 124억 달러(약 15조6200억 원)까지 치솟았다. 현대차 시가총액(6일 종가 기준 34조801억 원)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나 아르고 AI는 기대에 걸맞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창업 6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새 투자자를 구하지 못했다. 포드는 아르고 AI 투자로 27억 달러(약 3조4000억 원) 손실을 봤다. 포드는 아르고 AI에 투자할 때만 해도 2021년이면 특정 조건에서 자율주행이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 팔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더그 필드 포드 최고기술책임자는 “복잡한 도시 환경에서 스스로 주행할 수 있는 로보택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아직은 기술도, 돈도 안 되고, 갈 길이 멀다는 고백이다. 포드는 완전 무인차보다는 운전자를 보조하는 ‘운전자 보조’ 기술로 방향을 전환했다.

미국 완성차 회사 포드와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 아르고 AI,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 리프트가 2021년 12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출범시킨 자율주행 차량 호출 서비스. /리프트

포드가 손을 떼면서 폴크스바겐도 발을 뺐다. 당시 폴크스바겐은 202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자율주행 밴 택시 상용화를 목표로, 아르고 AI와 함께 미국자동차공학회(SAE) 기준 레벨 4(차가 대부분 상황에서 사람 개입 없이 스스로 주행할 수 있는 단계) 수준의 첫 모델 전기 ID. BUZZ AD(자율주행)를 시범 운행 중이었다. SAE는 자율주행 기술 수준을 레벨 0~5의 6단계로 분류한다. 레벨 3부터가 운전자가 운전하지 않고 자동화 주행 기능(automated driving features)이 운전을 통제하는 단계다. 올리버 블루메 폴크스바겐 최고경영자는 “특히 미래 기술 개발에 있어선 집중과 속도가 중요하다”며 완전 자율주행보단 단기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더 큰 더 낮은 단계의 자동화 기술 개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차량 반도체 개발 기업 호라이즌 로보틱스가 2021년 7월 공개한 레벨 4 자율주행용 프로세서 '저니(journey) 5' 이미지. /호라이즌 로보틱스

◇ 폴크스바겐, 미국 버리고 중국 선택…中 차량 반도체 회사와 합작사 설립

폴크스바겐이 미국 자율주행 스타트업을 버리고 선택한 곳은 중국이었다. 아르고 AI 투자 중단 발표 직전인 지난해 10월 13일, 폴크스바겐은 자율주행차용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생산하는 중국 스타트업 호라이즌 로보틱스(Horizon Robotics 地平綫 디핑셴)와 중국에서 자율주행 합작사를 세운다고 발표했다. 폴크스바겐의 자동차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CARIAD)가 24억 유로(약 3조2200억 원)를 투입해 합작사 지분 60%를 갖는다. 이번 거래의 일환으로 폴크스바겐은 호라이즌 로보틱스의 지분 일부와 이사회 자리도 확보했다.

폴크스바겐과 호라이즌 로보틱스는 철저히 중국 시장에 최적화된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과 자율주행(AD)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했다. 중국에서 중국 소비자가 원하는 바에 맞춰 중국 시장용 전기 ADAS·AD 차를 빠르게 내놓겠다는 것이다. 폴크스바겐은 “한 개의 통합 칩에 여러 기능을 통합하면 시스템 안정성을 높이고, 비용을 낮추고, 전체 자동화 시스템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며 “중국에서 출시하는 배터리 전기차(BEV) 모델용 ADAS·AD 솔루션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ADAS는 운전자의 주행과 주차를 돕는 시스템으로, 레벨 2 부분 자동화와 레벨 3 조건부 자동화가 포함된다. 사실상 ‘반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리서치 기업 블룸버그NEF는 2030년 세계 ADAS 시장 규모가 연간 2200억 달러(약 277조 원)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최대 시장인 중국 현지에서 자율주행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전기 자율주행차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폴크스바겐이 호라이즌 로보틱스의 손을 잡은 핵심 이유로 꼽힌다. 중국은 폴크스바겐 전 세계 연간 판매량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시장이다. 폴크스바겐은 2021년까지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브랜드였다. 그러나 지난해 폴크스바겐의 1~11월 중국 누적 판매량은 14만3602대로, 중국 BYD(15만2863대)에 밀렸다(중국 CMBI 집계). 현지화가 약하고 디지털 역량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 분야 제재도 폴크스바겐이 중국 현지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나서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중국 시장용 차량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중국에서 만들려는 것이다. 더크 힐겐베르그 카리아드 최고경영자는 “기술 현지화를 촉진하기 위해 ‘중국에서 중국을 위한’ 개발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 차량용 반도체 개발 기업 호라이즌 로보틱스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위카이가 2021년 7월 29일 상하이에서 3세대 '저니(journey) 5' 프로세서를 소개하고 있다. /호라이즌 로보틱스

호라이즌 로보틱스는 중국 인터넷 기술 기업 바이두(Baidu)에서 AI 연구소와 자율주행 사업부를 맡았던 위카이(餘凱)가 2015년 베이징에서 창업한 차량용 반도체 개발 회사다. 딥러닝 기술을 이용해 주로 자율주행차용 반도체를 만든다. 지금까지 레벨 2~4 자율주행 수준의 AI 반도체를 개발했다. 중국의 첫 차량급 프로세서인 1세대 ‘저니(Journey) 2′가 2019년 8월, 2세대 ‘저니 3′가 2020년, 3세대 ‘저니 5′가 2021년 7월 공개됐다. 이 중 1~2세대인 ‘저니 2′와 ‘저니 3′ 프로세서는 2021년 말까지 누적 출하량 100만 개를 넘어섰다. 레벨 4 등급으로 설계된 ‘저니 5′ 시스템온칩(SoC)은 지난해 대량 생산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아직 양산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호라이즌 로보틱스는 올해 7nm(나노미터) 프로세스를 활용하는 ‘저니 6′ 차량용 반도체를 공개할 예정이다.

호라이즌 로보틱스는 중국 완성차 회사인 상하이자동차(SAIC)·창청자동차(GWM)·BYD·제일자동차(FAW)·광저우자동차(GAC) 등으로부터 전략적 투자를 받았을 뿐 아니라, CATL(배터리)·인텔(반도체)·ARM(반도체) 등 자동차 산업 공급망에 속한 기업, 힐하우스캐피털·SDIC·YF캐피털·5Y캐피털·베일리기포드 등 벤처캐피털에서도 투자를 받았다. SK와 SK하이닉스도 이 회사에 투자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9월엔 중국 체리자동차(Chery)로부터도 전략적 투자를 받았다. 체리자동차의 투자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 기업 데이터 플랫폼 치차차 자료에 따르면, 호라이즌 로보틱스는 지난해 9월까지 비공개 투자금을 제외하고 최소 34억 달러(약 4조28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위카이 호라이즌 로보틱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는 “중국에서 자율주행 컴퓨팅 솔루션을 상용화하고 대량 생산한 회사로서, 카리아드와 협력해 스마트 차량 사용자를 위한 차세대 기술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 전기차 제조사 샤오펑이 2022년 9월 출시한 G9 세단에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이 장착됐다. /샤오펑

◇ 자율주행에 열려 있는 中 소비자…스마트 전기차가 잘 팔린다

중국에서 요즘 잘 팔리는 차는 일정 수준의 자율주행 혹은 스마트 주행 기능을 갖춘 전기차다. 경영 컨설팅 기업 맥킨지앤컴퍼니 산하 ‘맥킨지 퓨처 모릴리티 센터(MCFM)’가 2021년 12월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중국 소비자는 서구 소비자보다 자율주행 수용도가 더 큰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 소비자는 자율주행 기능에 더 열광하며, 돈을 내고 살 의향이 더 크며, 레벨 4 파일럿 자율주행차 구매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설문 참여자 중 1만 달러 미만 레벨 4 첨단 파일럿 차량을 살 의향이 있다고 답한 소비자는 중국이 60%, 미국이 57%, 독일이 36%였다.

중국의 대표적 전기차 스타트업 샤오펑(XPeng)은 지난해 9월 도시 안에서 이용할 수 있는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을 내놨다. 라이다(LiDAR, 레이저를 이용해 거리를 탐지하는 부품)가 달린 P5 세단은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를 통해 ‘시티 NGP(내비게이션 가이디드 파일럿)’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 할 수 있다. 시티 NGP 설치 차량은 도시 도로에서도 운전자 개입 없이 자동으로 주행할 수 있다. 샤오펑은 도시 내 주행을 위한 ADAS를 출시한 중국 첫 자동차 회사가 됐다. 샤오펑 창업자인 허샤오펑 최고경영자는 “시티 NGP 출시와 함께 고속도로와 주차장부터 훨씬 더 복잡한 도시 주행 환경까지 ADAS 사용 시나리오를 확장할 전략적 로드맵을 짜고 있다”고 했다. 샤오펑이 지난해 9월 출시한 G9 SUV에도 ADAS가 장착됐다. 샤오펑은 2021년 3월 P7 세단으로 남부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수도 베이징시까지 일주일간 3675㎞ 자율주행 테스트를 한 바 있다. 당시 사람 개입 빈도는 100㎞당 0.7번으로 적은 편이었다.

중국 지리자동차가 바이두와 협력해 만든 스마트 전기차 합작사 지두자동차의 레벨 4 수준 자율주행 첫 모델 ROBO-01. /로이터 연합

중국에서 자율주행 기능이나 반자율주행 시스템을 탑재한 스마트 전기차는 판매량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최근 1~2년간 중국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자율주행차를 바라보는 중국 소비자 인식을 한층 높여놨다. 중국 전기차 전문 스타트업과 프리미엄 전기차 브랜드는 고해상 지도와 AI 반도체, 라이다 등을 탑재한 레벨 3 자율주행 수준 전기차를 대거 출시했다. 테크 기업과 모빌리티 기업이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충칭·우한 등의 자율주행 시범구에서 운영하는 로보택시(자율주행 택시)가 더 흔해지면서 일반 소비자에게 자율주행차는 더 익숙해졌다.

중국 최대 민영 자동차 기업인 지리자동차는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자율주행 자회사 모빌아이와 손잡았다. 지리차 산하 프리미엄 전기차 브랜드 지커(Zeekr)에 레벨 4 자율주행을 가능하게 하는 ‘모빌아이 쇼퍼(chauffeur)’ 자율주행 시스템을 넣기로 했다. 지리차와 바이두가 만든 스마트 전기차 합작사 지두자동차(集度汽车 Jidu Auto)는 첫 모델 ROBO-01을 올해 3분기부터 구매자에게 인도한다. 바이두의 고급 스마트 주행 기술과 퀄컴 반도체로 구동되는 차다. 지두자동차는 도로 정보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가 안 되는 현재의 고해상 지도 대신 컴퓨터 비전 AI 기반 지도 시스템 개발에도 착수했다.